소신과 분류

미니멀리즘이 내 결정장애를 고쳐주었다

by 하트온

선택의 폭이 넓어도 너무 넓다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많다.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혜택이며,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로, 선택의 폭이 넓어도 너무 넓어졌다. 물 한 병 고르려고 해도, 수입 제품들까지 들어와 브랜드가 수십 종에 이르며, 스마트 티브이를 켜서 오늘 뭐 볼까 고르는 데만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결정장애를 부르는 내 안의 공포


이것보다 더 나은 옵션이 있었으면 어떡하지? 남이 나보다 더 좋은 걸 더 좋은 값에 찾아내면 어떡하지? 더 나은 게 있을지 모른다는, 남이 나보다 더 좋은 딜을 찾지 않을까 더 좋은 걸 누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던 인간을 괴롭히는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SNS나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쉽게 타인의 선택들을 엿볼 수 있는 요즘 시대엔,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일상을 파고든다. 누가 뭘 사고 뭘 고르고, 누굴 만나고 어디로 여행을 가고, 어떤 음식을 먹었다는 알림이 1분 1초 단위로 날아온다. 내 선택들이 끊임없이 관찰되고 평가당하고 있다는 압박까지 더해져, 비교의식과 조바심은 공포로 확대되고, 이젠 선택이 두려워지는, 내가 내 선택을 믿지 못하겠는 결정장애를 부르기에 이른다.


미니멀리즘이 가르쳐 준 소신


소신이란 내 내면에 자리 잡은 내부적 기준을 말한다. 이 내부적 기준이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 망설임 없이 빨리 마음을 정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소신이 없다면, 외부적 기준을 가져와야 하고, 외부적 기준에 맞추려는 노력은 엄청난 시간 낭비와 에너지 낭비를 초래한다.


미니멀리즘은 나에게 내부적 기준, 소신이 되어 주었다. 사람을 어떻게 여기고, 물건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지 기본적인 마음 자세 철학부터,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과 필요치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 소신의 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늘 나는 내 결정장애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분류의 기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분류의 기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기로 마음먹는 사람 누구나 거쳐가는 기본 단계는 물건 정리다. 이 단계는 나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치 않은 것을 분류해서, 필요치 않은 것들을 없애고,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여, 필요한 것들을 더 잘 활용하며 살아가는 미니멀 라이프의 바탕을 만드는 과정이다. 여러 가지 영역에서 이 과정을 거듭 거치면서, 나는 항상 모든 것을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연습이 되었다.

매일 쓰는 중요한 것 --> 잘 보이는 데 보관

매일 쓰지는 않아도 꼭 있어야 하는 것 --> 매일 쓰는 중요한 것을 다 보관하고 남은 공간에 보관

아직 쓸 수 있지만 필요 없는 것 --> 나눔/도네이션/중고거래

낡거나 고장 나서 못쓰게 된 것들 --> 버림


물건을 분류할 수 있으면, 다른 모든 것도 분류할 수 있다. 내 결정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나는 내 결정을 필요로 하는 영역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보았다.


하루 지나면 잊힐 결정: 일상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좀 못한 선택 해도 한 시간만 지나버리면 잊어버릴 사소한 결정

'하루 지나면 잊힐 결정'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일들은, 오늘 점심 뭘 먹을까, 식료품점에서 어떤 식재료를, 생필품점에서 어떤 브랜드 제품을 고를까, 혹은 오늘 밤 넷플릭스에서 어떤 드라마 영화를 골라 볼까, 오래간만에 휴식 시간이 생겼는데 뭘 하며 시간을 보낼까, 책을 볼까, 친구와 카페에 갈까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결정들은 어떤 선택을 해도 크게 잘못될 일이 없다. 오늘만 지나면 생각도 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카테고리의 선택지에 대해 자신의 에너지를 쓰기보다 남에게 모든 선택의 권리와 책임을 맡기는 행동이 바로 '아무거나'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겠다고 나오는 것이다. 조종 욕구가 심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대가 이렇게 나오는 건 사실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운에 맞기는 선택을 하곤 한다. 회사나 학교 같은 조직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흔히 쓰이는 것이 사다리 타기이며, 혼자서 결정할 때는 동전을 던지거나, '어느 것을 할까요...' 선택 송을 부르며 결정하기도 한다. 그만큼 어느 것을 골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니 이런 류의 선택 상황에서, 정확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색, 취미, 친구,... 기호를 분명히 정해둔 게 없어 선택을 즐길 수 없다면, 너무 에너지와 시간을 뺏기는 대신, 많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늘에 운명을 맡기는 방법을 쓰기를 권한다.


몇 달 안에 잊힐 결정: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보다 못한 선택을 하면 한동안은 속상할 수 있는 결정

'몇 달 지나면 잊힐 결정'은 선택을 잘못하는 경우, 한동안 후회가 남을 수 있지만, 사실 일상에 별 지장이 없는 일들에 대한 선택을 말한다. 가령 여행지를 어디로 정할 것인가, 여행하는 동안 어느 호텔에 묵을 것인가, 올 겨울 어떤 코트를 살까, 어떤 커피 빈을 살까, 어느 브랜드의 미니 오븐을 살까 하는 것 등이다.


설사 나중에 더 마음에 드는 게 나타나도, 세상 무너질 일은 아니다. 그러니, 여기에도 너무 큰 에너지를 쏟지 않는 게 좋다. 이런 선택은 전문가 찬스를 쓰기 권한다. 여행은 주변에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옷은 주변 패셔니스타에게, 커피 빈은 커피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전제품은 주변 살림꾼에게 물어보고 권하는 대로 그대로만 사도 잘못된 선택을 할 일은 거의 없다. 물론 당연히 내 마음이 끌리는 아무 거나 선택해도 된다. 선택하는 일이 즐겁기만 하다면 말이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이게 가장 좋아서 골랐어'하고 내 선택을 존중하고 믿어버리면 그만이다.


지속적으로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 일상을 좌우하는 크고 중요한 결정

'지속적으로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은 나의 일상의 행복을 크게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선택들을 말한다. 직장을 선택하는 일이나, 집을 사는 선택, 배우자를 고르는 선택, 자녀를 언제 가지고 어떻게 교육시켜 나갈지 하는 선택, 노후 준비를 위한 선택들을 말한다. 이것이야 말로 나의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 정보와 데이터를 잘 모아 많은 시간 연구하고 생각하여 잘 선택해야 하는 일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일 수록 운명에 혹은 주변 사람에게 선택을 맡기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나에게 중요한 것을 타인에게 맡기거나 외부적 기준을 끌어 오는 것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지름길이다. 내 마음에 분명하고 바른 소신이 자리 잡아야, 난무하는 장사꾼들의 거짓말 속에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그리고 내가 무엇을 갖추어야 행복해하는 사람인지 잘 파악해야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버릴 결정: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거나, 아예 선택 자체를 보류해야 하는 사안

때론 내가 선택할 일이 아니거나, 어떤 것을 선택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은 정말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에 물 붇기'다. 타인의 결정은 깨끗하게 타인에게 맡기고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하고,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모든 선택지가 답이 아니다 싶은 일은 아예 생각 자체를 하지 않거나, 버리고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 답일 수 있다.



선택을 즐기자


이 세상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 고통 가운데 놓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선택의 여지,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상황이며,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불필요한 일에 힘을 빼지 않는 연습, 소신을 가지고 기준을 확립하여 나에게 맞는 결정 내리기를 거듭 연습하여, 선택의 순간들을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원한다.


예전엔, 내 소신이 없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의존하곤 했던 내가, 요즘은 사람들에게 점점 소신 있는 사람, 뭔가 뒷배가 있는 듯 당당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미니멀리즘 덕에 자리 잡힌 소신을 바탕으로 결정 연습을 거듭하는 사이, 나는 점점 더 내 판단과 안목을 믿어주고, 내 선택과 결정을 믿어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