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가 있는 삶 ep.6 (by 코리하 라이브)
여섯번째 이야기: 기획일을 하는 코하의 라떼
글: 코하
기획자로 20년 넘게 살았습니다.
40대 중반의 코하라는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절반 정도를 기획자로 산 셈입니다.
이쯤되면 천직이다 싶지만 이 일의 시작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 일어났으니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나이대에선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만 20대 초반의 나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백통의 이력서를 쓰고 수십번의 면접을 봤지만 그 소원은 쉽게 이룰 수는 없는 소원이었습니다.
세상에 바퀴가 있는 삶은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낯선 무언가였고, 세상은 낯선 무언가를 대함에 있어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이력서의 지체장애 1급이란 표기는 이력서에서 가장 큰 탈락 이유였고 (물론 다른 탈락의 이유도 수십가지는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면접의 대부분은 면접을 보기도 전에 회사의 위치와 편의시설 유무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피씨 통신 시절 아는 선배의 추천으로 작은 디자인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친구들이 모두 대학을 가기 위해 애쓸 시간에 고등학교 입학식날 자퇴권유를 받고 백수였던 터라 놀면서 배워둔 컴퓨터 스킬이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회사는 대표가 오픈마인드라 사원의 장애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작은 회사였으나 입지조건이 괜찮아 휠체어가 드나들기 어려움이 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내 사회생활의 극 초반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디자이너 시절이 그리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회사를 들어간지 6개월만에 회사가 사업 분야를 확장하게 되고 그 분야가 당시 최첨단 산업이던 IT-인터넷이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그 중에서도 웹사이트 제작으로 회사의 사업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어차피 남아도는(?) 디자이너들을 보유하고 있던 당시 대표는 그 인력에 웹프로그래머를 소수 영입해서 웹페이지를 만들어 대박을 내보자는 꿈에 부풀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회사의 변화 덕에 아직 디자이너로 완전히 자리잡지 못한 6개월차 풋내기 디자이너는 대표의 지시로 순순히 웹사이트 기획을 해보기로 합니다. 자신 앞에 얼마나 큰 지옥이 펼쳐질지 깨닫지 못하고 말이죠.
1990년대 후반 당시엔 웹사이트 기획이라는 말도 익숙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표가 원했던 것은 전문적인 기획자라기 보단 웹사이트를 만드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문서작업만 잘 해봐라(하필 내가 기획자로 뽑힌 것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잘 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그 회사에서 MS오피스를 가장 잘 사용하는 축에 드는 사람이었던 것도 한 몫 했을 겁니다)였습니다. 하지만 기획이라는 직업이 누구든 할 수 있고, 직장인이라면 누구든 조금씩은 그 업무의 일부를 알게 모르게 하고 있지만 제대로 하려면 나름 어려운 직업인지라 당시 아무것도 몰랐던 나로써는 난감할 수 밖에요.
게다가 요즘에야 서점으로 향하면 웹관련 기획서적이 시리즈별로 주르륵 쏟아져 나와있지만 당시엔 인터넷 초창기 시절이라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해볼 수 밖에요. 당시 피씨통신쪽 혹은 인터넷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업체에 다니던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기획서 비슷한 것만 있으면 전부가 아니어도 좋으니 일부라도 받아서 기획서들의 양식을 참고하고 매일 30개 이상의 사이트를 찾아 보며 해당 사이트들의 구조과 UI, 디자인 등을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낮에는 업무도 했어야 하는지라 주로 퇴근 후 밤에 기획자로써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다보니 자연히 잠을 줄여 공부를 하는 강제 주경야독 모드에 들어서며 옛 선비들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몸소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를 더 보내고 나서야 웹사이트 기획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겠더군요.
그렇게 고생하며 기획자 비슷한 무언가로 포지셔닝을 했습니다만 이후에도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6개월간 고생하며 웹사이트 기획을 체득(공부도 아니었다고 생각하기에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말 그대로 몸에 쑤셔박는 체득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하면 편할 줄 알았는데 변화가 너무나도 빠른 이 바닥에서 그것만 해서는 먹고 살 수가 없더군요.
그리하여 20년 동안
웹사이트, 웹컨텐츠 기획
인터넷 (중대형) 커뮤니티 관련 기획
이커머스 관련 기획
웹드라마, 광고 영상 관련 기획
인터넷 방송, 동영상 플랫폼 관련 기획
웹툰, 웹소설 플랫폼 기획
웹 게임, 모바일 게임, 콘솔 게임 기획
해외 컨텐츠 현지화 기획
스마트폰 게임 및 어플리케이션 기획
.. 등을 해봤으니 대충봐도 인터넷을 매개로 하는 대부분의 서비스를 기획해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매번 다른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개념/기술들을 배우느라 밤을 새야 했던 것도 디폴트 옵션이었구요. 2~30대에 디폴트 옵션덕에 너무 많은 체력을 끌어다 쓴 관계로 지금은 안 그래도 성하지 않은 몸이 더 삐걱거리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20대 초반의 코하는 운이 (엄청나게 무지무지) 좋았기에 취업을 할 수 있었고 기획이란 직업을 운명적(?)으로 만날 수 있었고 20년이 넘게 일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긴 합니다. 당시의 첫회사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시기가 국내에 IT붐이 일어났던 시기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기획일을 오래한 코하는 아마 세상에 없었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IT붐을 지나 IT강국이 된 한국에 다소 장애가 있더라도 할 수 있는 직업이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다양하게 늘어나는 것을 시대와 함께 흘러가며 지켜봤던 것도 나름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너무 고인물이 되어버린 한 기획자가 이제 사회초년생으로 진입하려고 노력 중인 다른 바퀴가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 고인물 기획자는 그래도 '라떼보단 낫겠지.'라며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실제는 어떤지 말입니다.
"취업은 어때요? 일하는 건 즐거운가요? 무엇보다 그 삶이 즐거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