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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하 Mar 19. 2021

타의적 욕구불만

바퀴가 있는 삶 ep. 15 (by 코리하 라이브)

열 다섯 번째 이야기: 타의적 욕구불만

글: 코하


이야기 하나

어릴적 나는 인형놀이를 좋아했습니다.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인형놀이하는데 언제고 끼고 싶었지만 초등학생 남자애가 여자애들의 인형놀이에 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아니, 여자아이들은 관대했어요. 언제든 내가 인형놀이에 끼는 것을 환영해줬거든요. 하지만 주변이 문제였습니다. 같은 남자아이들은 내가 여자아이들과 인형놀이를 하는 것에 대해 놀림거리로 생각했고, 어른들 역시 사내아이는 사내아이답게 놀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덕에 나는 내가 인형놀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감추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 네. 나는 나의 성별 때문에 나의 욕구를 외면해야 했습니다.


이야기 둘

나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른바 덕후입니다. 그리고 나이는 40대의 남자입니다. 이른바 아저씨팬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과거에도 아저씨팬, 덕후에 대한 시선이 너그러웠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에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잇살이나 먹어서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 건 뭔가 이상한 일 아니냐'는 이야기입니다.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며 앞에서 대놓고 '로리타' 운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왜 내가 순수하게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 팬으로 활동함에 있어 나의 성적취향 검증까지 받아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난 팬으로써 스타를 좋아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게임을 좋아하는 게임 덕후이기도 했습니다. 어릴적부터 좋아한 게임이고 취미생활로 꽤 오랜 시간을 즐겨온 게임이지만 게임을 하는 것은 항상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릴적엔 게임은 공부한 다음에 하는 것이고, 나중에 커서 (대학에 가서) 해도 늦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이후에 게임을 하려 했더니 나잇살이나 먹어서 게임을 한다며 다른 취미를 가져보란 조언을 받았습니다. 어쩌라는 건지.. 나는 그저 나의 여가 시간에 게임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 네. 나는 나의 나이 때문에 나의 욕구를 검증받아야 했고, 취미의 변경을 요구받아야 했습니다.


이야기 셋

내 삶에서 중요한 취미 중에 하나는 공연 관람입니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콘서트나 좋아하는 음악가의 콘서트, 연극 공연이나 뮤지컬 공연 같은 현장감 있는 공연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공연은 내 삶의 활력소이자 힐링을 하고 내가 좀 더 삶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공연을 즐기기엔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잘하거나 혹은 공연을 볼 수 없을정도로 치명적인 난관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난관들을 넘어 공연을 보려면 때로는 다소 무리가 따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공연 관람을 하기 위해 노력할 때,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굳이 공연을 보려 하느냐."라는 말을 자주 듣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해당 공연의 관계자라는 분이 직접 그런말을 한 적도 있었을 정도에요. "다른 좋은 공연 많으니 그걸 보시라. 우리 공연을 굳이 왜 보시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이죠.

• 네. 나는 나의 장애 때문에 나의 욕구를 무시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쓸데없는, 합리적이지 못한, 네가 해서는 안되는, 해봤자 손해인, 네가 할 수 없는, 등의 다양한 이유로 너의 욕구는 잘못됐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더해서 욕구를 말하거나 표현하는 건 꽤나 체면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나의 욕구란 그저 내 삶에서 작은 활력소이자 내가 지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취미나 힐링 포인트일 뿐인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일까요? 내가 나의 욕구에 솔직한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이런 이야기는 단지 저의 경험일 뿐이지만, 세상을 살면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욕구에 대해 별 이유같지도 않은 이유들을 내새우며 타인의 욕구를 부정하는 예는 이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습니다.

물론 어떤 욕구라도 언제나 존중 받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의 욕구가 범죄의 범주에 있거나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욕구는 당연히 제재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욕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누군가의 삶에 일부일 뿐인 그런 욕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 쉽게 타인의 욕구를 재단하고 평가하는데 꽤 적극적인 사람들을 쉽게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주변의 지인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일 수도 있으며, 오랜 시간 만나온 친구일 때도 있고, 가까운 연인일 때도 있고, 심지어 때때로 가족이기도 하고, 어쩌면 나라는 사람 역시 무의식적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행동을 하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문득 우리(남의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 아주 일부의 선지자를 제외하고)는 어쩌면 이 글의 제목처럼 '타의적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삶을 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다보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타의적 욕구불만'을 넘어 '자발적 욕구 검열'이라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조금은 공포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세상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 이상 끊임없이 누군가는 자신의 취미를 부정당할 것이며 누군가는 자신의 취향을 검증받을 겁니다. 누군가는 성인이면서 아이들처럼 논다고 조롱당할 것이고, 누군가는 남자가 여자처럼 하고 다닌다고 속닥이는 뒷담화를 들을 것이며, 그 결과 누군가는 욕구를 제한한 채, 그저 숨만 쉬고 일만하는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희곡 '파랑새'에서 틸틸과 미틸은 많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파랑새를 찾았으나 모두 죽거나 잃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상심한 틸틸과 미틸은 마지막에 항상 주변에 있었던 작은새가 사실은 파랑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론 이 이야기에서 파랑새는 희망이나 행복을 상징하고 그렇기에 행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임은 분명합니다만, 조금은 다른 해석으로 파랑새는 사람을 행복으로 연결하는(행복하게 해주는) 욕구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욕구를 이뤄 행복을 전할 파랑새는 당신이 가장 원하고 가장 잘 아는 바로 '그것'일테니까...





부디 나이, 성별, 인종, 장애유무, 성적취향 등.. 모든 조건을 떠나 적어도 그 행위가 범죄가 아니라면, 그리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누군가의 욕구가 무시당하거나, 폄하당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 역시 다른 이의 욕구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거나 조언이랍시고 이상한 강요를 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조금은 자신의 욕구에 솔직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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