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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하 Mar 26. 2021

벽을 넘어서..

바퀴가 있는 삶 ep. 16 (by 코리하 라이브)

열 여섯 번째 이야기: 벽을 넘어서..


글: 코하


발단

어떤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어렸을 적 좋아하던 애니메이션, 소설, 게임의 주인공들은 벽을 넘어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앞을 가로막는 다양한 벽(적이나 라이벌, 물리적/심리적 장애물, 개인적~세계적 위기 등)을 넘어서 마침내 결실을 이뤘습니다. 그들은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컨텐츠를 너무 많이 봤던 탓일까요? 아이는 언젠가는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전개

아이는 어린 나이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 앞에는 무척이나 하기 편한 위로가 쌓입니다.
"사람이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은 신이 부여하지 않는다. 네가 시련을 겪는 이유는 네가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라는.. 
너무나 보편적인 이런 위로에도 아이는 순수했기에 꽤나 긍정적인 기운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위기

마음 속에 영웅을 향한 동경을 품고, 숱한 위로의 말을 듣는 세상 속에서 살았던 그 아이는 꽤나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 자라납니다. 그래서 아이는 인간이 겪는 시련(벽)이라는 명제에 대해 언젠가 넘어낼 수 있는.. 그래서 마침내 영웅이 될 수 있는 미션 정도로 생각하게 됩니다.


절정

영웅 지망생이었던 아이는 세상에서 마주한 다양한 벽에 대해 때로는 참고 견디고 때로는 맞서 싸우면서 예정되었다고 굳게 믿었던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결국 영웅이 되기엔 너무나 평범한 장애인1일 뿐이었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미 수 많은 벽에 부딪혀 깨지고 많은 수의 실패를 경험하고 난 후였습니다.


결말

영웅을 꿈꿨던 아이1은 아주 평범한 장애인1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아이에겐 남은 에너지가 없었어요. 불완전 연소 후에 남은 에너지 조금으로는 아이 앞에 수없이 펼쳐져있던 벽을 넘어서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포기라는 것에 대해 배웠습니다.



재미도 감동도 없습니다. 그저 벽을 넘기 위해 바둥거리다 결국 포기한 한 인간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패담일 뿐일 이 이야기를 나만은 버릴 수 없습니다. 결국 이건 내 이야기니까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체 장애를 겪어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장애인에게 세상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매 순간이 벽이라고 느껴지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고작 자그마한 계단으로 대표될 수 있는 수많은 편의시설의 부재가 이 그 아이에겐 벽이었고, 장애인이라면 일단 배재하려고 드는 일자리 역시 벽이었으며,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알아보지도 물어보지도 않고 미리 불가 딱지를 붙여버리는 시스템이 벽이었고, 차별을 하지 않기 위해 차별을 행하는 교육 행태 역시 벽이었습니다. 


그런 벽들과 그 외에도 별처럼 많은, 끊임없이 새로 생성되는 벽들에 지쳤다고 큰 잘못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저는 더 이상 벽을 넘어서길 포기했습니다. 세상에 나서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벽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영웅이고 싶었지만 애초에 그럴만한 재능이 없었던 겁니다.


누군가는 안타깝다고도 말씀해주셨지만.. 어쩌겠어요. 이게 나의 한계인 걸요. 애초에 가진 깜냥이 이것 밖에 안 되었던 겁니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열심히 살았으니까, 모든 걸 걸고 도전도 해봤었으니까, 이 정도에서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벽을 넘어서길 포기했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벽을 넘어설 순 없지만 남아있는 작은 에너지들을 모아 이 이야기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를 할 생각입니다. 적어도 이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세상에서 작은 목소리라도 끊임없이 내며 잊혀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진짜 영웅이 나타났을 때 그가 엄청난 에너지로 이 이야기들을 함께 끌고 가서 벽을 넘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웅이 벽을 넘어준다면 영웅이 넘은 벽의 자취를 따라 높게 솟은 벽들도 점차 그 높이를 낮추겠지요. 그러다보면 언젠가 지금의 벽이 벽이 아닌 그런 세상도 오지 않을까요? 그렇게 우리 세상은 변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변할 겁니다.



적어도 그 세상에선 두 칸의 계단이란 벽 앞에 서서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맛있게 마셨던 커피 한 잔을 잃지 않아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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