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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Sep 07. 2023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 멋진 아침> 시사회 리뷰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 근래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내가 나인지 일이 나인지 모를 일(?)아일체의 상태가 되었다고나 할까. 나 자신으로 불리기보다는 직책이나 일 그 자체로 불리기가 비일비재했던 요즘, 괜스레 센치해져서는 '삶이란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따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존재한다는 것. 그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그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가장 본질적인 자신으로서 존재하게 되는걸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의문을 품어 봤을 거라 생각된다.


영화 <어느 멋진 아침>의 주인공, 산드라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1. 이도 저도 아닌 삶

 

산드라의 삶은 미적지근하다. 평온함에서 오는 미지근함이 아니라 언제든지 끓어오르거나 얼어버릴 수 있는 애매한 상태라고나 할까. 그는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는 아버지의 다정하고 충실한 딸이자 사랑스러운 외동딸을 소중히 보살피는 한부모 가정의 엄마이다. 또 한편으로 어머니의 방임 아래 자라난 소녀였고, 더 이상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 여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들'을 묵묵히 수행하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마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살아갈 뿐인 이 삶에서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퇴행성 질환으로 인해 점점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잊어버리는 아버지를 보며 산드라는 수없이 되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거기 육체(요양원에 있는 아버지)는 껍데기일 뿐이고 책(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모은 유산)은 영혼이니까'라고. 이는 아버지를 두고 한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을 얼마쯤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 않을까.



2. 눈 먼 사랑

그런 그에게도 삶의 낙이 있다. 전남편의 친구인 클레망은 힘든 나날을 보내는 산드라의 곁을 지켜주며 그를 살뜰하게 위로해 준다. 클레망을 만나면 재미없고 우울한 나날들도 잠시 잊히고, 산드라는 온전히 그 자신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취한다. 클레망은 자신을 온전히 '산드라'로 봐주는 것만 같다. 산드라는 그가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존재하게'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잊었던 것만 같은 사랑이 다시 불타오르자 그의 삶은 활력이 돈다. 그것이 너무 달콤해서일까. 그는 그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 클레망이라는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것. (그렇다. 프랑스 영화가 프랑스 영화했다.) 산드라에게는 클레망이 무엇보다도 절실하지만, 언제나 한쪽 다리는 '자기 가정'에 담그고 있는 클레망에게 산드라는 언제나 2순위다. 아무리 달콤한 말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들,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산드라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를 끊지 못한다. 이런 사랑이라도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을테니까. 그것은 담배나 술과도 성질이 비슷하다. 해로울 게 분명한데도 끊지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마도 산드라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미적지근하게. 때때로 위태롭게 불타오르면서.




3. 존재한다는 것

다시 산드라의 아버지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보자. 산드라의 아버지인 게오르그 교수는 퇴행성 질환으로 일평생에 걸쳐 쌓아온 지식을 잊어간다. 얄궂은 뇌의 착각으로 인해 시력이 남아 있는데도 앞을 보지 못하고, 어느 장소에 있으면서도 그 장소에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해 버린다. 자신의 존재를 끊임 없이 지키고자 써내려갔던 게오르그의 수첩은 그의 절실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딸인 산드라도 어쩌면 아버지와 사정이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보다도 상황이 나쁜 것 같다. 적어도 아버지인 게오르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를 온전히 사랑해 주는 끝사랑이 남았지 않은가. 그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잊고, 사랑을 잊었다. 나중에는 클레망을 온전히 독차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잊고, 잊은 척을 하는 사이에 그는 점점 약해진다. 희미해진다. 이리저리 휩쓸리는 미적지근 한 삶 속에서. 어느 쓰고도 멋진 아침을 맞이하면서.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하는 이는 곧 존재하는 것'일까? 혹은 김춘수의 시처럼 '타인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진정한 나로서 산다는건 대체 어떤 것일까?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남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겠다는 생각만은 확실하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느 멋진 아침>을 보며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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