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지도 색칠하기로 시작한 국내 여행 프로젝트
“이번 가을에는 어디에 가볼까?”
갓 결혼한 2017년 가을, 우리 부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추석연휴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 추석연휴가 길어 우리에 남는 자유시간이 3일은 나올 수 있게 됐다.
제주도? 강릉?
가을엔 날씨도 좋으니 이왕 가는거 멀리 제주도?
아니야. 주말에 가볍게 갈 수 있게 가까운 강릉.
평소라면 이렇게 우린 대화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매번 이렇게 여행지를 정하다보니 여행을 좋아해서 자주 가는 내가 가본 여행지는 생각보다 단조로웠다. 친구들은 내게 "강릉에 집 샀니?", "제주도에서 너에게 명예시민증 줘야겠다."라고 농담할만큼 여행은 자주 가는데 가는 곳이 늘 쳇바퀴 굴러가듯 했다.
물론 그 어떤 여행도 똑같은 여행은 없다. 첫 번째 가본 강릉과 두 번째 가본 강릉, 그리고 열 번째 가본 강릉은 다르다.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나이에 따라, 함께 하는 사람 등에 따라 여행은 달라지고, 새로운 가게가 한 달에도 수십 군데가 생기는 요즘은 더 그렇다. 하지만 이왕 가는 여행, 이번엔 남들 다 가는 유명한, 뻔한 곳이 아닌 색다른 곳을 가보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 지도 펼치기. 지도앱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내가 처음 우리나라 지도를 펼치는건 마치 어렸을 때 게임하다 미션 수행하기 위해 급하게 보물지도를 보는 것 같았다.
“옥천, 괴산, 함평, 군위..?!”
놀랐다. 지도를 보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지역이 꽤 많다는 것에. 그래서 벌떡 일어나 구석에서 색연필통을 꺼내 그동안 내가 다녀온 곳들을 색칠해보았다. ‘여행을 많이 다녔으니 얼마나 많은 곳이 색칠될까’란 나의 기대와 달리, 색칠해보니 절반도 안된다. 그리고 그때 결심했다. 우리나라 지도를 하나하나 색칠해가는 느낌으로, 하나의 지역씩 새롭게 다녀보기로.
“그래서 우리가 갈 곳이 어디라고? 고성? 고창? 아니다. 고흥이지!”
그렇게 정한 첫 여행지는 전라남도 고흥. 처음엔 내가 갈 지역 이름도 헷갈렸다. 무작정 그렇게 정하고 차로 밟고 간 고흥은 구름만큼 섬이 많고, 한적할 틈 없이 굽이굽이 꺾어지는 길이라 한가롭게 드라이브를 할만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 내려서 찬찬히 바라보니 오히려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오히려 한가롭고 여유롭게 즐기기 좋은 풍경을 담고 있는 곳이었다.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에 한센병으로 격리된 우리 민족들의 아픈 역사 흔적이 남아있는 소록도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내가 그날 우리나라 지도를 펼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고흥 여행을 와봤을까, 역사를 전공했음에도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던 내가 무지를 깨달을 수 있었을까.
고흥을 시작으로 두 번째 간 곳은 단양이었다. '단양'하면 패러글라이딩 하러 가는 곳 정도로만 알고 있던 내게 도담상봉의 풍경은 그림 같았다. 수십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보이는 초록빛 바다의 석문, 정도전이 좋아하여 자주 찾아와 경치를 감상했다는 곳이 담긴 이야기, 마늘이 유명한 곳이라 온통 마늘 들어간 먹거리는 다 먹어본 경험. 이것도 단양을 와봤기에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후 하동, 남해, 진주, 서산, 충주, 공주, 구례, 고성, 양구, 고창 등을 다니며 '우리나라 지도 색칠하기'의 국내 여행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한 곳 한 곳을 여행갈 때마다 나는 우리나라 지도에 내가 다녀온 곳을 색칠해나갔다. 마치 어렸을 때 색칠공부를 하며 소소한 재미를 느꼈던 것처럼 한 곳씩 색칠될 때마다 한 조각의 퍼즐이 맞춰진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색칠 영역을 넓히고 싶어 반드시 이번엔 이곳을 가야 한다는 미션 수행 같은 의무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색칠된 곳은 나만의 추억 흔적이자, 쌓여가는 경험의 무게, 그리고 우리나라에 대한 애착심의 표현이다. 또한 우리나라에 역사적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곳이 없듯이 한 곳 한 곳을 다녀올 때마다 알게 되는 그곳만의 역사 지식이 채워지는게 좋았다.
지금은 다음번 여행에 대한 준비 중이다. 어떤 여행을 갈지 생각해보고 계획을 세우는 것도 하나의 여행이기에 나는 오늘도 우리나라 지도를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