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일하지만 은행원은 아니에요
처음 은행에서 일하던 날이 생각난다.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받느라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손님들은 예고 없이 밀어닥쳤다. 동전을 들고 오는 손님, 지폐를 교환하러 온 손님, 통장을 분실한 손님, 공과금을 내러 온 손님 등 손님들의 용무는 다양했고, 그에 따른 대처를 하는 법을 익히기 위해선 부지런히 전임자를 따라다녀야 했다. 모든 일과가 끝이 나고 은행 문이 닫혔다. 그래도 은행 일은 끝이 나지 않는다. atm기기를 마감하고 동전을 개수하고 객장을 정리하면 일이 대충 마무리된다. 전임자에겐 마지막 근무 날이라 지점 사람들이 이것저것 선물을 준비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덕담을 건네며 앞으로 잘 지내라고 인사를 건넸다. 마음이 훈훈해졌고, 그분이 그동안 은행원들과 잘 지내왔고 일도 잘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마지막도 저렇게 훈훈하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2년 3개월 년 수로 3년째 일하고 있었다. 보통 지점장은 한 번 지점에 부임하면 2-3년 정도 있는데 내가 일 할 때는 1년마다 바뀌었다. 그래서 올해로 세 번째 지점장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사실 지점장과는 그다지 마주칠 일도 이야기할 기회도 많지 않다. 지점장은 지점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고 난 말단 직원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고 딱히 할 이야기도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잘 지내왔다. 나에게 터치만 하지 않으면 그게 잘 지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새로 온 지점장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지점이 바쁠 때는 열심히 일하지만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보통 책을 읽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책 읽는 걸 두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 전 지점장님은 내가 책 읽는 걸 좋게 보셔서 칭찬을 하셨으니까 난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2년 동안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앉아서 책 읽지 말라고 팀장님이 지적을 하셨다. 그때는 그냥 하는 말이겠지 하고 흘려들었는데 두세 번 주의를 받고 난 뒤로는 나도 책을 읽지 않았다. 어쨌든 근무시간에 다른 짓하는 게 잘한 일은 아니라고 나도 생각해서 읽지 않았다.
4월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용역업체 팀장님이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희재 씨 지점에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별 일 없는데요?”
“근데 저 지금 지점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가서 이야기해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지점장이 업체 팀장을 불렀다는 말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난 그것을 직감했다. 30분 후 팀장이 지점에 도착했고 지점장실에서 1시간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할까. 그 후 지점장실에서 나오는 팀장님의 얼굴은 거의 반쯤 죽어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지점장은 나에게 원하는 기준이 높았다. 스마트 어플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깔기를 원했고, 그러려면 손님들 한 분 한 분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요청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영업을 시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난 은행원이 아니다. 물론 도와드릴 순 있지만 그게 내 일이 아닌데 내 일인 양 할 순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것 말고도 은행원이 해야 할 일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하기 싫다고 말했더니 나를 자르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계약을 6월까지만 하고(난 4월에 입사해 4월이면 재계약을 한다.) 지켜본 뒤에 개선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2달 뒤 계약해지되었다.
이후에 행동이 개선되지 않아서 잘린 걸까? 난 지점에서 시키는 일은 다 했다. 하지 말라고 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잘렸다. 이 말은 애초에 내가 어떻게 해도 자르기로 결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일을 못했던 건가. 아니 난 누구보다도 일을 잘했다. 2년이 넘게 일을 해 오다 보니 친한 손님들도 많아 그분들은 항상 나를 찾으신다. 말하지 않아도 그분들이 뭘 하러 오셨는지 거의 다 알 정도다. 그리고 공과금 납부 또한 은행원들은 모르는 것 까지 다 알고 할 수 있었다. 또한 atm기기는 고장이 나면 담당자인 출납계장도 항상 나를 부른다. 그렇듯 이미 굉장히 숙달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런 나를 그들은 무엇 때문에 잘랐을까. 그것은 아마도 ‘실적’ 때문일 것이다. 업체 팀장이 말했다. 지점장이 전에 근무하던 지점에서는 청경(은행 경비원)이 직접 나서서 스마트 어플을 깔았다고 했다. 스마트 어플 = 실적이다. 난 그들에게 실적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렸던 것이다. 아무리 손님에게 친절하게 하고 다른 일을 잘해도 실적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어차피 돈 없는 손님은 실적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 잘해 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실제로 그렇다.
업체 팀장은 나에게 실업급여를 챙겨 줄 테니 끝까지 잘해달라고 달랬다. 이게 말이냐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 당연한 걸 마치 챙겨준다는 마냥 말하는 게 정말 가증스러웠다. 어차피 업체도 ‘을’인 입장이라 지점에다가 뭐라 말할 수 없다. 은행이 ‘갑’이기 때문에 업체 또한 지점 측에서 원하면 다른 업체로 교체를 할 수 있는 처지기 때문이다. 은행이 갑이고 업체가 을이면 그 업체에 소속된 난 병 아니면 정? 그쯤이다. 나 따위 병정이 갑에게 게기니까 이렇게 목이 날아 난 것이다. 난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계약해지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잘린다고? 이건 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가끔 언젠가 나도 여기를 그만둘 때가 오겠지 하면서 상상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면 처음 이 지점에 왔을 때 봤던 전임자의 모습처럼 서로 덕담을 하며 인사를 건네며 아주 훈훈하게 마무리를 하지 않을까 하고 상상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기대는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물론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면 된다. 잘려도 그냥 내 잘못이다. 내가 못나서 잘리는 거다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엔 내가 이 지점에 쏟은 애정이 생각보다 깊었고, 맨날 싫다 싫다 하지만 그래도 손님들과의 정을 끊어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일방적이었고,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래서 더 억울하고 더 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1인 시위라도 해야 하나.
이렇게 힘없이 나가떨어져야 하는 건가. 비정규직은 이렇게 끝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점심시간이었다. 교대로 밥을 먹고 오는데 지점장이 점심을 먹고 내 앞을 지나가며 말했다.
“밥 먹었니?”
난 순간 머리가 띵 했다. 평소라면 그냥 진짜 밥 먹었냐고 묻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내 밥줄을 직접 끊으신 장본인이다. 그런 분이 내 밥걱정을 하고 있다니... 이게 뭐야 지금 나 엿 먹이는 거야?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그냥 그 당시에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지점장이 업체 팀장에게 말했다.
“우리는 가족처럼 대해 줬어.”
다시 묻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가족이란 한두 번 말 듣지 않는다고 집에서 좇아내는 게 가족인 가냐고 그런 게 가족이라면 난 사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지점장님 카톡 배경 사진에는 우리 가족^^이라는 문구와 함께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그분에게 가족이란 의미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지점장은 생각보다 치밀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날 후임자에게 어떻게 인수인계를 할까 고민했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불법적인 일들은 일절 인수인계해주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후임자가 오지 않았다. 내가 그럴 줄 알고 지점장은 나에게 인수인계를 맡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할 줄은 진짜 몰랐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입맛대로 부려 먹기 위해 새로운 직원을 뽑은 것이다. 가장 말 잘 듣고 다루기 쉬운 사람으로 말이다. 그에 비해 난 다루기 힘든 사람이었다. 워낙 오래 일하다 보니 아는 것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아 지점장 입장에선 자기 입맛대로 부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자른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고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떠나기 전에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손님들과 인사를 했다. 손님들은 믿지 않았다. 내가 있어서 너무 좋았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연신 인사를 하셨다. 손님들이 나를 위로해 주셨다. 이런 일로 기죽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편의점 사장님(아들도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은 나에게 많은 힘이 되어주셨다. 위로를 해주셨고, 가끔씩 오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친했던 고무신 아저씨(항상 고무신을 신고 오신다)는 내가 일을 그만둔다고 말한 다음날부터 매일 와서 눈도장을 찍으셨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가셨다.
순대 할머니에게 일을 그만둔다고 말하니 처음에는 믿지 않으셨다가 나가실 때 내 손을 꽉 잡으시곤 손에다 오만 원을 쥐어주셨다. 그리곤 꼭 장가가라는 말씀은 빼놓지 않으셨다. 그리고 순대 할머니뿐만 아니라 나와 친했던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아마도 평생 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삶을 끝맺음하는 그 날까지 건강하고 또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마지막 날 모든 일을 끝내고 평소와 다름없이 똑같이 인사하고 지점을 나섰다. 그런데 그 어떤 누구도 나에게 그동안 고생 많았다. 뭐 이런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이건 정말 너무 서운 했다. 난 2년 넘게 이곳에서 뭘 한 것이었을까. 허무했다. 지점 문을 열고 나서니 부지점장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도 어쩔 수 없이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옷 갈아입고 지점장실에 잠시 들리라 했다. 아마도 선물 같은 걸 줄 생각인가 본데 난 전혀 그따위 선물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그 길로 집으로 향했다.
너무 허무하고 서운하고 분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나의 은행 경비원 생활은 끝이 났다. 그런데 이제 무슨 글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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