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어릴 적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세계여행을 하는 게 꿈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어렸을 땐 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어른들이 시켜서 말하는 직업적인 꿈 말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딱히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릴 적 꿈을 10년 후에 알게 되었다.
당시 여행을 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계여행을 가겠다고 부모님을 모두 설득시키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위해 돈을 모아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되었다. 짐을 챙기며 방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아주 오래된 usb가 나왔다. 그냥 버릴까 하다 안에 뭐가 들었나 하고 컴퓨터를 켰다. 거기엔 오래전에 군대를 간다고 은행에서 받아둔 공인인증서와 영화 몇 편과 한글 파일 몇 개 그리고 학교 과제를 한다고 저장해 둔 파일이 몇 개 들어있었다. 그래서 하나 씩 차례로 열어 봤다. 그러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의미심장한 파일을 하나 열었다.
그것은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썼던 글이었다. 일기 비슷한 거 같은데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내가 쓴 건 맞다. 글의 내용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 부분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세계를 여행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 그래서 세계지도에 나의 발자국을 하나씩 찍어 보고 싶다 언젠간 꼭 해 볼 것이다.”
19살,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런데 8년이 지난 후 19살 때 꿈꿨던 세계여행을 가기 직전에 있었다. 그랬다. 아마도 나의 어릴 적 꿈은 세계여행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까맣게 잊은 채 살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8년 후에서야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이 어릴 적 꿈이었다는 걸 8년이 지난 후에 깨닫게 되었다. 그 글을 본 후 난 더 확신할 수 있었다. 나에게 이 여행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나에게 어릴 적 꿈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던 분이 다시 물었다.
“꿈을 이뤘는데 이후에 허무하지 않던가요?”
사실 그랬다. 여행을 끝낸 후 난 방황을 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이제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도 자신의 꿈이었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너무 기뻐서 행복했지만 꿈을 이룬 후 다음엔 뭘 위해 살아야 할지 몰라 허무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우린 꿈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꿈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을 두고 대단하다고 말하며, 그 꿈을 이룬 사람을 보고 존경하며,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 꿈은 실현 가능성이 적으며 또는 아예 실현이 불가능한 것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꿈이라는 단어의 뜻 또한 그렇다.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현상,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이 꿈의 사전적 정의이다. 그 꿈을 위해 열심히 달려와 드디어 꿈을 이뤘다. 하지만 꿈을 이룬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삶은 계속되고 나는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난 꿈이라는 것에 대해 그렇게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누군가 나에게 글 쓰는 게 어릴 적부터 꿈이었냐고 물으면 그렇긴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하고 싶긴 했지만 하고 싶다고 다 꿈이 되는 건 아니니깐. 꿈도 사랑처럼 너무 많이 쓰이면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릴 것 같고, 평가절하 되어 버릴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꿈을 이룬다는 느낌이 되어버리면 너무 부담이 될 거 같아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라고 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말이다.
우린 '문턱 문화'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어릴 적부터 많이 들어오던 말이다.
“대학만 입학하면 너 하고 싶은 거 다해”
“취직만 하면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거 다해야지”
“결혼만 하면 이제 더 바랄 게 없을 거야”
이런 말들을 들어 봤을 것이다. 그것만 하면 된다. 그것만 이루면 마치 그다음은 유토피아가 펼쳐져 있을 거 같은 그런 환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이젠 우리 모두 다 안다. 그 문턱 넘어 엔 더 이상 유토피아 같은 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대학만, 취업만, 결혼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하고 나니 사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사실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더 중요할 텐데 아무도 말해 주는 사람이 없다. 그렇게 우린 다시 방향을 잃게 된다.
나에게 어릴 적 꿈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본 분이 다시금 물었다.
“여행을 끝내고 방황하는 건 다시 다른 꿈을 찾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요?”
맞다. 난 다시 다른 목표를 찾기 위한 준비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방황을 하는 건 필수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헤매고 방황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하나의 문턱을 넘고 난 후에 우린 모두 방황을 한다. 그 방황을 넘어서면 또 다른 목표가, 꿈이 내 앞에 놓여 있게 될 것이다. 우린 그것을 위해 또 살아간다. 그것이 작던 크던 평범하던 특별하던 나에게 있어서 의미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꿈에 대해서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말자.
윤태호 작가님의 미생은 명대사가 많기로 유명하다. 주인공인 장그래는 꿈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결국 포기하고 현실을 택하여 원 인터내셔널이란 무역회사에서 2년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두고 선배인 김동식 대리는 이런 말을 했다.
“당신 실패하지 않았어. 나도 지방대 나와서 취직하기 되게 힘들었거든? 근데 합격하고 입사하고 나서 보니까 말이야.
성공이 아니라 그냥 문을 하나 연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 어쩌면 우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
그렇다. 꿈을 이룬다고 성공한 인생이라 말하긴 어렵다. 반대로 꿈을 포기했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이라 말하긴 어렵다. 대기업에 취직을 한다고, 공무원이 된다고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룬다 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말대로 그냥 문을 하나 연 것뿐이다. 그리고 그 앞엔 또다시 다른 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음 목표인 출간을 하고 난 후에도 방황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당황하지 않으려 한다. 이 방황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그저 하나의 문을 연 것뿐이라는 것을, 다음 스텝을 밟을 준비과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