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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 Aug 13. 2020

생애 가장 행복했던 때

퇴사는 했지만 여전히 글은 씁니다

내가 가장 행복했을 땐 행복하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했다. 무언가에 푹 빠져 있어서 그것이 행복이다 아니다 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 나를 옆에서 지켜보시던 엄마는 이런 말을 했다. “너를 평생 동안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렇게 행복해하는 건 처음이다.” 그때야 비로소 ‘아 난 지금 행복하구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20대 후반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한창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봐도 참 멋있었다. 눈빛은 초롱초롱했고, 말에는 힘이 있었고, 자신감이 가득했고, 생기가 흘러넘쳤다. 꿈이라는 것을 처음 가져 본 아이처럼 들떠 있었고, 그토록 갖고 싶던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설렘과 희망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그랬기에 하루에 15시간을 일해도 전혀 힘들지 않았고, 이후에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호주에서 1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사실 호주에서의 시간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타지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먹고 자고 돈을 벌고 생활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만은 않았다. 그런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원하는 목표가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새벽 2시에도 일을 나갈 수 있었고, 일주일 내내 쉼 없이 일해도 견딜 수 있었다. 


새벽에는 주로 청소를 하러 간다. 시티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커다란 술집과 식당 그리고 겜블링을 할 수 있는 유흥 단지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세수도 하지 않고 자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모자만 눌러쓴 채 픽업 차에 탄다. 그리고 30분 동안 차에서 쪽잠을 잔다. 잠에서 채 깨지도 않은 상태로 청소를 시작한다. 반쯤 잠이 든 상태이지만 이미 오랫동안 일을 해 오다 보니 몸이 알아서 기억하기 때문에 정신을 반쯤 놔도 일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면 청소는 마무리되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어느새 해는 아침을 알리는 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오전 6시를 넘어 아침으로 향해 달리고 있다. 



새벽 청소를 하며 항상 귀에 이어폰을 꼽고 노래를 들었다. 그중 가장 많이 듣던 노래는 이적과 유재석의 ‘말하는 대로’라는 노래이다. 노래의 가사는 유재석이 보낸 20대 시절의 자전적인 내용이다. 이 노래의 가사 하나하나가 마치 나의 상황을 대변하듯 들려왔다. 내일 뭘 할지 알지 못해 불안한 잠자리에 눕던 그는 꿈을 꿀 수 있게 되었고, 사실은 한 번도 미친 듯 달려든 적이 없었다는 그는 다시금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그렇게 맘먹은 대로 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꿈이라는 걸 향해 나아가는 가사는 나에게 큰 울림과 감동과 희망을 줬다.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새벽을 깨웠고, 매일 아침 해를 누구보다 먼저 맞이했다.


그렇게 1년이 흘러 드디어 내가 그토록 원하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호주에서 1년간 있으며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 덕분에 무사히 호주를 떠날 수 있었다. 나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었고 아플 때 돌봐주었고, 작은 사고나 어려움이 있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했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은 나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모든 것들이 고맙기도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브리즈번에서 가장 번화한 퀸 스트리트에서 free hug를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다. 그냥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당일이 되니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서 영상을 찍어 주기로 한 동생에게 그냥 하지 말까 했다가 여기까지 와서 그만두면 후회할 거 같았다. 그리고 생각을 조금 바꿨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나머지는 그들에게 맡기자.’ 그렇게 난 길을 나섰고, 크게 free hug라고 적힌 종이를 펼쳤다. 그랬더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hug를 해줬다. 처음 30초는 너무 민망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반응이 좋아서 심지어 장소를 옮겨서 한 번 더 진행할 정도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낯선 사람들을 차례로 껴 앉아 봤다. 그때의 그 느낌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황홀했다. 마치 인류애?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나이도 성격도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고 그냥 모르는 낯선 사람이지만 나는 그들의 온기를 느꼈다. 그리고 그들의 배려와 관심을 느꼈다. 나를 껴안아주던 그들의 얼굴은 마치 호주 하늘처럼 맑고 선명했다. 그들의 표정은 해맑고 투명했다. 무엇보다 나의 얼굴은 그 어느 때 보다 행복해 보였다. 낯선 땅의 이방인이 낯선 땅에 와서 잘 지내다 간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전 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래서 행복했다. 영상을 찍어주던 친구도 감동을 받았는지 자신도 해보고 싶다고 해서 그 친구도 free hug를 했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이후에 간단한 영상을 제작하여 sns에 올렸다. Sam Ock의 I’m Free라는 곡을 배경음악으로 썼다. 노래와 영상이 너무 잘 맞아떨어졌다. 영상은 빠른 속도로 공유가 되었고, 좋아요와 댓글이 수십, 수백 개가 달렸다. 그렇게 나의 여행은 많은 사람들의 응원 속에 시작할 수 있었다. 


1주일간 호주 여행을 끝내고 마침내 시드니 공항에 섰다. 이젠 그토록 원하던 남미를 갈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우유니 사막을 볼 수 있고, 마추픽추를 내 발로 오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가득 찼다. 시드니 공항에서 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취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 호주에 도착했던 날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던 때,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었던 때, 걱정과 불안이 교차하던 때를 말이다. 그리고 새벽을 생각했다. 새벽을 깨우고 유재석과 이적의 ‘말하는 대로’를 들으며 지구의 한 곳을 깨끗이 청소하던 그때를 그리고 낯선 이들의 온기를 생각했다. 그들의 마음을 그들의 심장을 느꼈다. 그렇게 난 여행을 떠나기 위해 호주에 왔지만 사실 이미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여행이란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은 충분히 지금 앉은 이 자리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었던 때를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을 말이다. 다시금 그런 느낌을 맞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아직 내 마음속에는, 기억 속에는 그때 그 순간이 온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 나는 그 기억과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행복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https://youtu.be/68bSRpr2XvI 프리허그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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