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는 했지만 여전히 글은 씁니다
아침이 되었다. 이제는 알람 소리에 아침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그렇게 알람 소리에 의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아침을 깨웠다. 과연 몇 시나 됐을까. 한 9시? 10시? 9시면 은행 문 여는 시간인데 그 시간에 이제야 잠에서 깼다는 생각에 ‘아 드디어 내가 백수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주위가 어둑어둑했다. 그래서 시계를 들여다보니 이게 뭔가 아직 꼭두새벽이었다. 6시 10분쯤 됐으려나? 아니 기껏 알람을 꺼 두고 잤더니 원래 출근하던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 버렸다. 뭔가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오지도 않는 잠을 자려고 애써 눈을 감았다. 아마도 이제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서 일찍 일어난 게 아닐까.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선잠을 자다 일어났다.
평일 아침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얼마만 이었을까. 뭐 생각보다 오래되진 안 았지만 그 느낌은 이질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많은 시간 들을 잘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 운동을 하러 나갔다. 따릉이를 타고 한강을 갔다. 시간은 8시 10분, 원래라면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따릉이를 타고 마포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마포대교를 건너며 다리 위에서 바라본 서울을 사진으로 찍어 인스타에 올렸다. 누군가 나의 인스타를 보면서 출근하지 않고 여유롭게 자전거나 타고 있는 나를 부러워하겠지 생각했다. 이제 무엇도 나를 구속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 지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원해서 된 백수도 아니니까 크게 죄책감을 가지 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구한다.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하고, 직장을 떠나 여행을 떠나거나 여유를 즐기고 싶어 한다. 그래서 퇴사를 하고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자유를 쟁취하진 못한다. 자유를 얻는 대신 불안도 함께 얻게 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유롭게 한강을 달리며 백수가 된 것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채 얼마 가지 않고 산산이 부서졌다. 운동을 마치고 물을 사러 편의점을 들어갔다. 그리고 물을 사려고 카드를 건넸고 결제를 했다. ‘띵’하고 문자 메시지가 왔다. “950원 일시불” 문자를 본 순간 나의 자유는 마치 한여름 밤 꿈이었던 것처럼 허망했고, 사막의 오아시스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듯 없어져 버렸다.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불안과 고독이 함께 찾아왔다. 앞으로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야 했고, 그 많은 경제적인 부담을 홀로 짊어져야 했다. 아직 난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세상은 나를 떠밀어 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백수가 된 첫날 굳이 아직은 깨닫지 않아도 될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왔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에리히 프롬 이란 독일 철학자가 쓴 책이다. 그는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유란 무엇인지 말한다. 과거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개인은 점점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계급의 경계는 무너졌고, 평등은 모두의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개인이 노력만 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개인은 자수성가를 이룰 수 있었고, 한 개인으로 시작된 것이 세상을 지배하고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개인의 노력으로만 평가받는 시스템 속에서 개인의 노력이 실패로 끝이 난다면 그 결과와 책임 또한 온전히 개인의 몫이 되어 버렸다. 그 속에서 개인은 점점 고립되고 고독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개인을 더욱더 고립시켰고 그로 인해 불안과 우울이 함께 동반하게 된다. 개인은 더 이상 남들과 다르기를 거부하게 되고 자기 자신이 되기를 그만둔다.
“자신의 개별적 자아를 포기하고 자동인형이 되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수백만 명의 다른 자동인형과 똑같기 때문에, 더 이상 고독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가 치르는 대가는 비싸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다.”
우리가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사실 당연하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복지가 좋은 북유럽 같은 국가들은 개인이 실패를 해도 다시금 갱생할 수 있게 사회적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보다 창의적으로 도전을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쟁시대의 대한민국에서는 개인이 실패를 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사회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모든 것이 개인의 능력과 선택에 좌우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묻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공평하고 평등한 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은 혼란스러워한다. 그래서 보다 더 안정을 추구하고 평안을 원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전을 꺼리고 안정적인 공무원을 원한다. 미래를 살기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런 곳에서 난 남들처럼 공무원을 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일까?
다시금 원하지 않는 일을 단지 불안해서 혹은 돈이 없어서 자유를 버리고 남들과 똑같이 살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은 서울뿐 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일을 열심히 해서 성과를 얻는다 해도 다시 회의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바로 자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한 말이 떠 오른다.
“나는 오직 내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삶을 살려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그렇다면 자유를 얻었지만 불안과 고독을 얻은 나는 어떻게 하면 자아를 잃지 않고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그대로 살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걸 알려주는 이도 없을뿐더러 그것은 나 스스로 찾아내야만 한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도 찾아주지도 않는다. 그것이 쉬웠다면 이토록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어렵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자아를 상실하지 않았을 것이고, 헤세도 싱클레어도 그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평생 찾지 못할지도 모르고 생각보다 빨리 찾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이미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는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처한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것이 글쓰기가 되었든 다른 무언가가 되었든 하는 수밖에 없다. 자유가 주어졌지만 생각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도 선택지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단, 실업급여가 끝나기 전까지만 그 후에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아를 잃으러 가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