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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 Aug 18. 2020

나는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죄인 같아

은행에서 일하지만 은행원은 아니에요

은행은 점심을 교대로 먹는다. 점심시간에도 손님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은행을 비울 수가 없다. 점심을 같이 먹는 조가 정해져 있다 보니 매일 같이 먹는 사람 하고만 먹는다. 그런데 하루는 다른 직원의 휴가로 인해 원래 같이 먹지 않던 직원과 같이 먹게 되었다.      


매일 점심 메뉴 정하는 것도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총무계장님과 나 둘은 근처 쌀 국숫집으로 갔다. 난 볶음면 요리를, 계장님은 쌀국수를 시켰다. 그리고 계장님은 요즘 나의 근황에 대해 물으셨다. 일하는 건 어떤지 퇴근하곤 뭘 하는지 그런 상투적인 이야기들을 말이다. 사실 나에 관해 물은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내 이야기가 끝나고 예의상 계장님은 어떤지 물었다. 그랬더니 계장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내셨다.     


“난 말이야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죄인 같아. 회사에선 맨날 실적 때문에 정신없고 또 대부계는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르겠어. 너도 알잖아. J과장... 진짜 일 안 하는 거 그 사람 것도 거의 내가 다 하니까. 미칠 지경이야.
거기다 얘는 어쩌고... 물론 엄마가 봐주긴 하지만 내 얜데 내가 봐야 하는데 맨날 야근하니까. 남편한테도 미안하고 엄마한테도 미안하고 진짜 직장도 집도 내 마음 둘 곳이 한 곳도 없다. 희재야... 넌 웬만하면 결혼 늦게 해라.”     


처음으로 회사에서 그 사람의 속마음을 들었다. 아마도 은행원이 아닌 나였기 때문에 털어놓을 수 있을 이야기일 것이다. 종종 이런 경우가 있다. 같은 은행원들이기 때문에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나에게 털어놓을 때가 있다. 아무래도 난 그들과 같은 곳에 속해 있지 않으니 뭔가 조금 덜 조심스러워도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나에게 털어놔도 소문이 날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은행은 생각보다 조직이 작기 때문에 작은 일도 금방 소문이 난다. 그들의 속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들도 나름대로 힘들게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난 그냥 묵묵히 들어주고 있을 뿐이다. 계장님도 그랬다.      


계장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가 가진 문제는 월급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로서 잘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환경이 따라주지 않고, 내 아들이지만 내가 돌보지 못해 아들에게도 미안하고 지금까지 딸을 돌보느라 일평생을 바친 엄마에게 이젠 자식의 자식까지 돌보게 하는 게 너무 미안할 것이다. 거기다 직장에선 일을 제대로 못하니 또 미안하고 세상에 미안한 것 천지라고 말하는 그녀의 어깨가 너무나 무거워 보였다.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결혼을 했든 하지 안 았든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 사람만이 가진 문제가 있고, 그 사람만이 가진 걱정이 있는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김지영은 계장님과 닮았으면서도 다른 모습이었다. 김지영은 결혼을 하기 전에는 광고회사를 다녔지만 결혼을 하고 아기를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고 집안 살림을 하느라 어느새 누구의 엄마 그리고 누구의 아내로만 살게 되었다. 어딘가에 소속된 것이 아닌 그저 한 가정에서 엄마이자 아내였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사실이 겉으론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속으로는 병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만 몰랐다. 내 삶에 내가 빠져 있다는 느낌은 나의 자존을 갉아먹는다. 그런 모습을 김지영의 엄마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딸이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저렇게 병들어가는 모습을 어느 부모가 두고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엄마는 다시 딸을 위해 희생하려고 한다. 하지만 딸은 그런 엄마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한쪽은 자신의 일을 하며 내 삶에 나를 가질 수 있었지만 그 덕분에 주변의 희생이 요구된다. 반대로 나 하나 희생하면 모두가 편하고 괜찮아진다. 사실 어떤 선택을 하던 모두를 만족시키는 법은 없다. 서로서로 도와주면서 살아야지 방법은 없다.




내 엄마가 생각났다. 난 딸이 아닌 아들이라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엄마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본다면 조금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엄마는 끊임없이 일을 하려고 하셨다. 기억에 남는 것만 4-5개의 일을 하셨다. 처음엔 화장품 방문 판매원을 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학습지 판매를 하셨고, 산후조리원에도 일하셨고, 병원에서 도우미 간호원도 하셨고 지금은 돈가스집을 하고 계신다. 그중 두 번째 직장은 엄마하고 잘 맞았던 것 같다. 꽤 바쁘게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집에는 학습지에서 파는 위인전과 동화들이 가득 찼었다. 엄마는 매일 출근하는 길에 동생과 나에게 책을 몇 권 읽으라고 리스트를 짜주고 퇴근 후에 검사한다는 엄포를 놓고 출근했다. 그렇게 엄마가 가고 나면 섭이와 나는 좋았다. 책을 읽는 게 좋은 게 아니라 엄마 없어서 좋았다. 사실은 엄마가 없어서 좋은 게 아니라 엄마가 다시 돌아올 걸 알았기 때문에 좋았던 것이다. 지금도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릴 적 엄마가 읽으라고 준 책 덕분이지 않을까?     


얼마나 일을 했을까. 엄마는 어느새 직장을 그만뒀다. 나중에 커서 이유를 물어보니 결국 나와 동생 그리고 아버지 때문에 그만뒀다고 했다. 아무래도 엄마가 나가서 일을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집안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분을 82년생 김지영에서 남편 정대현(공유)처럼 도와줬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사실 가사는 돕는 게 아닌 내 일로 생각하고 해야 한다.) 내 아버지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 온 사람이 아닌 가부장적인 경상도에서 60년도에 태어나셨다. 집안이 어질러져 있고 아이들은 밥도 먹지 못하고 있으니 아버지는 화가 난 것이다. 자신이 돈을 못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나가서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셨다. 사실 엄마는 돈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건데 말이다. 그래서 엄마는 큰 계약이 걸려 있는 손님과의 약속을 깨고 집으로 돌아와 밀린 빨래와 설거지를 했다.(그 계약이 성공했으면 아마 승진했을 테고 집안일은 점점 더 소홀해졌을 거다.) 그때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은 물어봐도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답답하고 억울하고 미웠을 거 같다. 젊은 날의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엄마는 그래도 아들 둘이 잘 커서 그걸로 만족한다고 하지만 엄마는 아마 아직도 마음속에는 그런 아쉬움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 아쉬움이 자식들을 통해 투사되는 게 보통 부모들의 마음이다. 내가 하지 못한 걸 내 자식에겐 꼭 시켜주고 싶은 욕심 말이다. 하지만 그런 욕심이 아이를 그르치는 가장 전형적인 형태이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좋았다. 그리고 요즘은 엄마가 집에서 살림만 하는 게 아니라 가게를 하고 계셔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계신다. 그래서 조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계장님은 1년 후 본사로 발령 나셨다. 그리고 1년 후 근무를 하고 있는데 정문으로 계장님이 들어오셨다. 유니폼이 아닌 정장 차림으로 말이다. 표정은 전 보다 밝아지셨다. 특유의 하이톤의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하셨다. 아마도 본사에서 영업점 관리 차원으로 나오신 모양이다. 다시 보니 반가웠다. 본사로 가셨으니 지금보단 일이 더 수월 해지신 모양이다. 얼굴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아직도 계장님이 가진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김지영 씨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우린 모두가 자신만의 문제를 가지고 산다. 그 문제를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어떤 부분에선 혼자만의 힘으론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럴 때면 도움을 받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내가 엄마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커 왔던 것처럼 계장님이 아들과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김지영 씨가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다 보면 조금씩 문제가 풀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문제가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어떤 선택이든 후회는 남을 수밖에 없고, 어떤 결말이든 영화처럼 해피앤딩으로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 문제가 있다는 건 어쩌면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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