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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미 Feb 15. 2023

바빌론(2022)리뷰



<위플래쉬>, <라라랜드>로 유명한 데미언 셔젤 감독의 신작. 28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에서 미술상을 수상했으며 80회 골든 글로브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음악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북미 흥행은 상당히 저조한 편이다. 개인적으로 스코어를 매기라면 6.5-7점 정도를 주겠다. 중반부까지 재미있게 봤는데 후반부 1시간 정도는 실망스러웠다. 엔딩 시퀀스는 최근 본 영화들 중 가장 작위적이었고, 몇몇 비평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거인의 어깨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다.


데미언 셔젤은 스타일이 확실한 감독이다. 나는 그 작품들을 대체로 재미있게 보았다. 마찬가지로 북미 흥행이 저조했고 국내 개봉 당시 주변에서 호불호가 크게 갈렸던 전작 <퍼스트맨>도 좋았는데, 이번 <바빌론>은 감독의 장편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아쉬움과 의문이 가장 많이 남는 영화였다. 그러나 결코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었다. 고전영화 애호가 또는 시네필이 본다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갈 만한 오마주가 여럿 나오고, 현란한 전개가 관객의 눈을 쉴새없이 붙잡아 둔다. 저스틴 허위츠의 음악은 어김없이 훌륭해서 귀가 즐겁다. 영화관에서 감상할 가치가 있는 영화다.


리뷰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 출처: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63733

*아래 리뷰터는 영화 <바빌론>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리뷰의 모든 내용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감상에 참고만 부탁드립니다.






환상의 불빛에 매료된 부나방들



1920년대 LA. 멕시코계 이민자 마누엘(매니)은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사 키노스코프 픽쳐스 임원에게 고용되어 온갖 궂은 잡일을 도맡고 있다. 어느 날 그는 고용주가 연 광란의 파티에서 넬리라는 무명의 배우 지망생을 만난다. 넬리가 파티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준 마누엘은 그녀와 영화에 관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넬리와 마누엘은 둘 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를 삶의 도피처로 여긴다. 얌전하고 감정을 억누르는 성격처럼 보였던 마누엘은 (물론 코카인을 흡입해서 텐션이 올라가기도 했겠지만) 영화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열정적인 태도로 이렇게 말한다. 영화 속에서는 누군가 죽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죽지 않으며 그게 정말 멋진 거라고.


바꿔 말하면 영화는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 않고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말 그대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환상이다. 동화 같은 사랑도 이루어지고 불가능할 것 같던 인생 역전도 성공한다. 실제로는 사이가 나쁘거나 데면데면한 두 배우도 영화 속에서는 세계 최고로 애절한 연인이 되며, 평범한 길거리도 영화 속에서는 의미심장하고 가치 있는 장소가 된다. 이것은 시청각 매체로서 (실사)영화가 지닌 강렬한 매력이자 위험한 힘이다. 영화는 실재를 다듬고 왜곡하고 포장해 내놓음으로써 관객들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유도한다.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현실 대신 온갖 전문가가 달라붙어 연출한 환상적 현실을 동경 및 선망하게 만든다.


마누엘은 ‘위대한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넬리는 무조건 유명해지고 싶어 하고 또 스타가 되고 싶어 한다. 마누엘이 생각하는 ‘위대함’은 다소 거창한 개념처럼 느껴진다. 자선 사업, 공공 복지, 노력을 통한 성취 등의 분야와는 거리가 멀다. 사회 규범을 잘 지켜서 범법 저지르지 않고 하루하루 자기 소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을 위대하다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그러나 마누엘은 그런 평범함에 매력을 느끼지도 않고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멘탈 단단히 붙잡고 현실 속 수많은 역경을 딛으며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되려 하기보다는 자신이 매료된 영화=현실도피적 환상을 재생산하고 싶어 한다. 한편 넬리는 술, 도박, 춤, 마약, 음악, 부, 화려함이 공존하는 당대 영화 산업과 완벽하게 조응한다. 업계의 정체성이 그녀의 정체성과 일치하기 때문에 굳이 다른 분야로 가서 기회를 찾을 필요가 없다.


<썸머 필름을 타고!>에서 주인공 맨발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영화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맨발에게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했다. 게다가 관객들이 더 이상 즐겨 보지 않는 장르인 시대극을 만들겠다고 고집함으로써 영화 제작이라는 행위에 담긴 일종의 예술혼과 순수성을 보여주었다. <시네마 파라다이스>에서 영화는 주인공 토토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현실과 영화 속 환상은 다르다고, 인생을 만만히 보지 말라고 충고한다. 토토는 이 충고를 가슴 깊이 새기고 고향을 떠나 감독이 된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토토의 선택은 현실의 역경을 헤치고 자기 인생을 꾸려 나가겠다는 정신적 자주성의 표출이자 그의 내면이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마누엘과 넬리는 애초부터 강한 세속적/물질적 욕망을 동반하고 영화 산업에 뛰어든다. 영화의 환상에 매료되어 그 일부가 되기를 바랄 뿐 본인들의 삶에 관한 진지한 고찰은 하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도 없다. ‘위대해지고 싶어’, ‘뭔가 더 의미 있고 큰 일을 하고 싶어’, ‘유명해지고 싶어’, ‘내가 처한 현실은 싫어’ 다 큰 성인들이 아직까지도 이런 어린애 같은 사고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루살이처럼 살면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만 노리고 있다. 꿈과 열정을 논하는 대화에도 코카인을 곁들인다. 그래서 그들의 꿈은 건설적인 인생의 청사진이라기보다 피상적 신기루처럼 보인다. 할리우드는 이 둘과 같은 어리석은 부나방들이 모여드는 화려한 바빌론이다. 거대 자본이 환상을 만들어 파는 악덕, 향락, 퇴폐의 본거지다. 자꾸 토사물이 쌓이고, 허무하게 픽픽 사람들이 죽어 나가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무저갱이다.





영화는 상업예술이고 미국 영화의 본고장 할리우드는 성장 초기부터 자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1차 대전 끝무렵이던 1910년대에 미국의 영화 산업은 본격적 태동기에 돌입한다. 많은 미국인들이 영화를 보길 원했으며, 약삭빠른 사람들은 큰돈이 되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영화 산업에 뛰어들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온 이민자들도 일자리를 찾아 할리우드로 몰려왔다. <바빌론>의 배경인 1920년대에 들어서자 할리우드 영화 산업은 지금까지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대형 스튜디오(워너브라더스, 파라마운트, MGM, 폭스 등)들을 중심으로 상당히 체계화된다.


1927년 유성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1920년대 초중반은 무성영화의 시대였으며, 찰리 채플린이나 메리 픽포드 같은 스타들이 인기를 끌었다. 스타 파워가 막강했던 이 무렵에는 스타 즉 인기 배우가 곧 스튜디오의 캐시카우였기 때문에 스튜디오들은 더 많은 스타들을 영입/양성하기 위해 애썼고 그들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자 했다. 영화의 흥행 조건에 스타 출연은 필수였고, 각본에도 일정한 제약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스튜디오들의 목적은 돈이 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즉 사람들이 보길 원하고 지갑을 열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대중 입맛에 맞는 각본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 시기 할리우드 영화의 트렌드는 ‘스타 마케팅+관객이 쉽게 공감하고 좋아하는 고전적인 서사’였다. 당연히 해피엔딩이 많았다. 더글러스 고메리(Douglas Gomery)에 따르면* 파라마운트 픽쳐스 창립자 아돌프 주커(Adolph Zukor)가 1920년대 초기에 이런 스타 마케팅과 고전적 서사 원칙을 적용한 영화들을 만들어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유명해지고 글로벌 수익성이 높아지는지 업계에 일종의 흥행 공식을 제시했다. (아돌프 주커는 사실상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개척자이자 진두지휘자였고 60년대에 은퇴 후 103세로 사망할 때까지 파라마운트 픽쳐스 명예회장이었다.) *Gomery, Douglas. The Hollywood Studio System: A History, ePDF ed., Bloomsbury Publishing, 2017. p.7 https://url.kr/tj294n


유럽 영화들이 좀 실험적, 전위적이거나 비극의 요소가 짙고 예술성이 강조되는 데 비해 미국 영화는 단순하고 화려하고 행복하며 상업성이 짙다는 오래된 인식이 있다. 편견이긴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할리우드는 점점 더 많은 자본을 투여해서 세트를 화려하게 만들고 최신 특수 효과들을 도입하고 빛나는 스타들을 배출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스펙터클에 감탄하고 즐거워하며 긍정적인 기분으로 영화관을 떠났다가 그 기억을 간직한 채 돌아와 티켓을 재차 구매하도록 유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스타가 된 인기 배우들은 막대한 부를 누렸고 화려한 삶을 살았다. 스타 파워가 많이 약해진 지금도 할리우드의 본질적 시스템은 변화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할리우드에서 스타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당장 이 순간에도 많은 배우 지망생들이 유명해지겠다는 꿈을 안고 LA로 떠난다. <라라랜드>의 미아처럼. 하지만 미아처럼 진짜 스타가 되는 사람은 극소수다. 다행스럽게도 <바빌론>의 넬리는 스타가 되는 데 성공한다. 본인이 자부하듯 이미 스타로서의 천부적인 기질과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에 업계 거물들의 눈에 띄고 금방 유명해진다. 마누엘도 엉겁결에 원로 스타 잭의 눈에 띄어 업계 거물로 성장한다. 마누엘과 넬리는 억세게 운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들과 비슷했던 대다수의 다른 부나방들은 아마 아무런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화려한 업계의 불빛에 진작 타 죽었을 것이다.






업계에서 각자 자신만의 역할을 하나씩 맡고 있는 주요 등장인물(신인 배우, 감독 지망생, 원로 스타, 연주자, 비평가, 퍼포머)이 모두 소개되자 광란의 파티와 함께 기나긴 오프닝 시퀀스가 끝난다. (오프닝 시퀀스 파티 장면이 바즈 루어만 스타일을 떠올리게 한다는 비평들을 봤는데 잘 모르겠다. 굳이 따지면 바즈 루어만식 파티 연출 한 스푼, <아이즈 와이드 셧> 한 스푼, <부기 나이트> 한 스푼에 <라라랜드> 감성까지 첨가한 느낌이었다.) <바빌론>은 크게 (1)마누엘과 넬리 (2)잭 (3)시드니의 시점에서 전개되며 중간중간 페이와 엘리노어가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인물이 많은 만큼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와중에 고전영화 오마주도 넣어야 되고 의미심장한 세트피스도 넣어야 되고 업계 비판도 해야 하지만 한편으론 영화 산업에 대한 헌정도 해야 하고 제작자인 내가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애정도 과시해야 하고…… 진짜 혼란 그 자체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뭐든 과유불급인 법인데…. 혼란스럽고 방종한 소재를 선택했다고 해서 영화까지 꼭 어지럽고 정신 사납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다….


영화 러닝타임은 3시간으로 결코 짧지 않지만 감독이 이 러닝타임을 적절히 잘 활용했냐면 개인적으론 아닌 것 같다. 덜어냄으로써 완성도를 더 올릴 수 있는 장면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넬리와 잭을 제외한 인물들은 전반적으로 개별 서사가 빈약해 때때로 그저 내용 전개를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마리오네트처럼 보였다. (PFCC 비평가 피어스 마천트(Piers Marchant)는 “인물들이 살과 피보다는 묘사representations처럼 보인다”고 지적한다: https://www.arkansasonline.com/news/2022/dec/23/over-the-top/?entertainment-movies) 각본 도처에 널린 서브 플롯들은 구조적으로 그다지 조밀하게 배치되지 못했고, 후반부 연출과 편집의 완급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아 클라이맥스까지 이끄는 응집력이 떨어졌다. 음악과 배우들의 연기가 이런 각본/연출/편집상의 약점들을 어느 정도 상쇄해 주지만, 바꿔 말하면 음악과 배우의 매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영화의 러닝타임/캐스트/소재를 고려했을 때 전작들보다 볼륨이 큰 작품인데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웠다.



여성 - 우상, 대상, 소모품



넬리는 자유분방하고 욕망에 충실하다. 춤과 향락이 주는 고양감을 즐기고 사랑한다. 초대받지도 않은 파티에서 그 파티 주최자의 눈에 띌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능숙하며 영화 촬영 중에도 어떻게 하면 본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지 본능적으로 안다. 배우인 넬리는 끊임없이 카메라에 담기고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며 빛나는 우상이자 욕망과 관음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업계 입장에서 넬리는 인격체라기보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만족시키기 위한 ‘상품’이며, 효용가치가 조금만 떨어져도 금방 교체될 수 있다. 넬리의 데뷔작 전임자가 그렇게 교체되었듯이.


넬리는 창녀 역할을 맡으면서 데뷔한다. 이후로도 성적으로 도발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는데 처음에는 이것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할리우드가 바빌론이라면 넬리는 성서에 나오는 바빌론의 창녀고, 자신이 속한 타락한 세계(업계)에 누구보다 잘 적응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서 사람들이 도덕성을 신경쓰기 시작’하자 그녀의 전성기도 끝난다. 무성영화 시대에 넬리는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면서 스스로가 지닌 매력과 에너지를 아무 제약 없이 발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 사운드가 돌입되면서 넬리는 행동과 목소리를 통제당한다. 마이크 위치가 표시된 곳까지만 걸어야 하며 녹음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만 내야 한다. 넬리가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사고만 치기 시작하자 스튜디오는 그녀를 골칫거리로 여긴다.


넬리에게는 마지막 한 차례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녀는 이미지 변신을 해서 숙녀가 되거나(포장을 바꿔서 상품가치를 쇄신하거나) 시대의 흐름에 도태되어 커리어를 끝내야(폐기 처분되어야) 한다. 당연히 넬리는 변화를 꾀해서 다시 스타로 성공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타고난 성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변화한 시대의 요구를 감당하지도 못한다.


현실이 그냥 아이스크림이라면 영화는(영화가 만드는 환상은) 토핑 뿌린 아이스크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넬리는 토핑을 싫어한다. 넬리는 있는 그대로의 본질 즉 진짜 자기 자신으로 사는 법 말고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가식적으로 꾸미는 방법을 모른다. 교양 있고 도덕성 있는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월가 대폭락을 겪고 대공황의 30년대에 접어들면서 보수화된 사람들)은 ‘대놓고’ 창녀처럼 구는 천박한 넬리를 비웃거나 손가락질했지만 넬리는 아닌 척 뒤에서 몰래 성희롱하는 그들의 ‘위선적인’ 천박함에 역겨움을 느껴 구토한다.


이미지 변신에 실패한 넬리는 커다란 도박 빚까지 지게 되며 결국 어둠 속의 댄서가 되어 LA의 그늘 저편으로 사라진다. 어디선가 요절한 그녀의 부고 소식은 너무나 흔한 이야기라는 듯 신문 한켠에 작게 실렸을 뿐이다. 유성 영화 커리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고 기사 헤드라인 속에서 넬리는 여전히 지난 시대의 무성 영화 스타로 기억되고 있다. 가장 빛나던 순간 외의 그녀는 기억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넬리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분투했던 과정들, 넬리가 받아들여야 했던 통제들, 넬리가 견뎌야 했던 역경들은 모두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듯 지워진다.



인종 - 넘을 수 없는 벽



뮤지컬 영화 촬영이 한창이던 도중, 마누엘은 연주자 시드니에게 지금 촬영하는 영화가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본다. “지금 나한테 의견을 묻는 거예요?” 시드니가 되묻고 마누엘이 대답한다. “네, 당신 생각을 알고 싶어요.” 같은 유색인종인 마누엘 외에는 업계의 주요 관계자들(대부분 백인들) 중 그 누구도 시드니에게 이런 질문을 건네지 않았던 것이다. 시드니는 카메라가 잘못된 방향을 비추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영화의 핵심 소재인 음악을 실제로 담당하는 연주자들은 모두 흑인인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들은 모두 백인이다. (<라라랜드>를 본 관객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대사다.) 마누엘은 시드니의 의견을 받아들여 영화 화면 속에 실제 연주자들을 집어넣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이 아이디어가 성공하자 마누엘은 업계에서 인정받는 프로듀서로 거듭나고 곧 키네스코프 픽쳐스에 스카우트된다. 마누엘은 시드니를 키네스코프로 데려와 스타로 만든다.


그러나 스타로서 얻은 명성도 시드니를 인종차별로부터 보호해 주지는 못한다. 시드니는 넬리가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파티에서도 은근한 모욕을 당하고 나중에는 마누엘에 의해 억지로 코르크를 사용해 블랙페이스 분장까지 강요당한다. (블랙페이스와 흑인 인종차별의 역사에 관해 좀더 알고 싶다면: https://www.history.com/news/blackface-history-racism-origins) 실력을 인정받아도, 물질적 부를 달성해도, 스튜디오로부터 받은 멋진 저택과 끝내주는 스포츠카가 있어도 시드니는 끝까지 ‘니그로’이며(극중 많은 등장인물들이 흑인들을 반복적으로 이렇게 지칭한다) 다른 백인 배우들과 같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



페이(레이디 페이 주)는 할리우드 최초의 중국계 출신 배우 안나 메이 웡(Anna May Wong)을 오마주한 인물이다. 1929년 월가 대폭락으로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저물고 호황이 끝나자 할리우드의 분위기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1930년에 헤이스 코드(Hays Code)라는 영화 소재 및 내용 검열 규정이 생겨서 1934년부터 영화에 실제로 적용되는데, 이 검열 규정 중에 ‘서로 다른 인종 간의 결혼’(Miscegenation)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유색인종 배우들은 백인 배우들과 영화에서 로맨틱한 관계로 묘사될 수 없었으며 키스 등의 애정 행위도 표현이 제한되었다. 유색인종 배우들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졌고 안나 메이 웡은 이런 할리우드의 현실에 좌절하여 유럽으로 떠나서 커리어를 쌓았다. (참고로 미국에는 서로 다른 인종끼리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도 있었고 이 법은 일부 주에서 1967년까지 지속되었다.)


페이의 배경 및 행보는 안나 메이 웡과 거의 흡사하다. 페이는 다방면에 재능 있는 여성으로 노래를 하고 퍼포먼스에도 능하며 원래는 연기자다. 스튜디오에서 배역을 주지 않아 대신 자막 만드는 일을 하는데 그 자막도 사람들의 기호에 맞출 수 있도록 감각적으로 쓰고 배치한다. 일종의 카피라이팅+편집 능력까지 있는 셈이다. 시대 배경을 감안했을 때 동양인인데다 레즈비언인 페이는 업계에서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다재다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페이는 자신의 약점인 예외성을 개성으로 치환해 할리우드에서 입지를 다진다. 예를 들어 (극중에도 화면에 가끔씩 등장하는)프릭쇼는 본래 사회에서 ‘기형적’이라 평가받는 출연진들의 외모를 서커스나 쇼의 형태로 개성화/상업화해 ‘볼거리’로 제공하며 주류 백인 사회에 편입되었다. 비슷하게 페이는 오리엔탈리즘에 가담하여 백인들이 원하는 ‘신비롭고 관능적이며 독특한 섹슈얼리티를 지닌 동양 여성’ 배역을 수행함으로써 할리우드에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할리우드는 그녀를 차이나드레스/남성복 따위를 입고 섹스어필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퍼포머 ‘레이디 페이’로 인식할 뿐 진지한 배우로 대하지 않는다. 이후 호황이 저물고 사회가 보수화되자 할리우드는 이제까지 볼거리로 소비해 왔던 그녀의 인종, 개성, 섹슈얼리티를 ‘부도덕한’ 것으로 낙인 찍고 내쫓는다.



영광 - 가냘픈 멜로드라마



잭 콘래드를 동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느냐 아니냐가 이 영화의 호불호에 많은 영향을 끼칠 것 같다. 넬리와 잭의 서사는 구조만 놓고 보면 비슷하다.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씁쓸히 퇴장하는 스타들이다. 이 둘은 다른 인물들에 비해 개인 서사가 풍부하고 나름대로 정돈되어 있다. 그러나 관객은 넬리보다 잭에게 이입하기 쉬운데, 넬리는 처음부터 히스테리컬하고 자기 통제가 되지 않아 객관적으로 문제가 많아 보였다면 잭은 적어도 ‘겉보기로는’ 멀쩡하기 때문이다. 그는 알콜중독에 여성 편력이 화려하지만 어쨌든 매너와 사회성을 갖췄다. 배우로서의 실력도 좋고 주변에서 인기도 많다. 이미 업계에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그는 범접할 수 없는 전문가이자 보통 사람들이 스타라고 하면 떠올리는 초상 그 자체다.


잭은 (매우 진부하게도) 모든 것을 가졌지만 내면은 공허한 스타다. 결혼 생활에 자꾸 실패하고, 다음 아내와도 어차피 갈라설 걸 알면서 계속 결혼한다. 일할 때도 일하지 않을 때도 언제나 술을 마신다. 잭이 정말로 욕망하는 것은 사실 멋진 저택이나 아름다운 아내가 아니라 자기 확신이다.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 특별한 사람이라는 확신. 심약한 친구 조지가 실연과 우울증으로 끙끙 앓고 있자 잭은 페이에게 다가가 정중히 부탁한다. 내 친구 조지한테 가서 말을 좀 걸어 달라고. 같이 자라는 게 아니라, 그의 기분을 좀 띄워 주고 자신이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해 주면 좋겠다고. 왜냐하면 조지가 잭에게 똑같이 해 주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언젠가 잭이 우울하고 불안정했을 때 조지만이 곁에서 그를 지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조지야말로 잭의 유일한 ‘진짜’ 친구, 잭의 능력을 처음으로 인정해 주고 잭이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믿게 해 준 사람이다. 조지는 잭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조지가 죽은 뒤 잭은 몰락한다. 잭도 넬리와 마찬가지로 상품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상품가치가 있느냐 아니냐를 판단할 뿐, 그의 내면에 자리잡은 외로움과 상실감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브래드 피트는 이 인물을 훌륭하게 연기했고 카메라는 시종일관 시대의 뒤안길로 저물어 가는 스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잭 콘래드는 내게 다소 기만적인 인물처럼 보였는데, (1)그가 아내 에스텔(브로드웨이 출신 유명 배우)에게 역정을 내며 영화의 ‘서민적’ 가치를 설파하는 장면이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다가왔고 (2)아무리 명성과 인기가 쇠퇴했다 해도 객관적으로 넬리보다 훨씬 나은 처지에 있었기에 그의 공허감에 공감하기 힘들었으며 (3)좋은 연기와 별개로 이 배역을 브래드 피트가 맡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잭은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아내 에스텔을 소위 ‘엘리트적인’ 배우로 폄하하며 연극계 자체가 대중 친화적이지 않다고 역정을 낸다. 하지만 사실 1920년대 미국의 연극계도 그다지 고상하지만은 않았다. 재즈 음악이 무대에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뮤지컬의 발달과 더불어 온갖 상업적인 공연들이 넘쳐나서 무대 수준이 점점 떨어진다는 비평가들의 불만도 높아져 갔다. 그 유명한 메이 웨스트(Mae West)는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성공하기 전 브로드웨이의 배우 겸 극작가로 활동했는데 데뷔작이 너무 선정적이고 파격적이라며 체포당하기까지 했다. (데뷔작 제목이 <SEX>인데 시 당국은 이 공연이 도덕적으로 너무 타락했다고 메이 웨스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잭이 극중에서 “입센이나 오닐 따위에 집착하는 너희 연극인들!” 대충 이런 대사를 하는데 지금은 고전이 된 입센의 몇몇 작품들도 발표 당시에는 비평가들에게 저속하다고 혹평받았다. 영화가 연극보다 더 솔직하고, 더 파격적이고, 경계를 부수며, 더 순수하고, 대중에게 더 가깝고, 관객과 더 잘 상응한다는 생각은 잭의 오만한 착각일 뿐이다. 실제로 잭은 이후에 인터뷰에서 연극 배우들이 영화 업계로 대거 유입되어 활약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영화는 대중예술이지만 동시에 자본과 결탁한 상업예술이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는 거대 자본 없이 성립할 수 없고 그 거대 자본의 생산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은 소수다. 할리우드에서 스타가 된 순간부터 잭은 이미 업계 기득권의 일원으로서 특혜를 누리게 된 것인데, 본인도 소수의 엘리트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연극계에 자격지심을 가지며 애먼 아내한테 화풀이나 한다. (감독은 대본 리딩 장면에서 에스텔을 오만하고 재수 없는 엘리트처럼 묘사하고 소위 서민 출신인 잭이 그런 에스텔에게 크게 화를 내면서 ‘한 수 가르쳐 주는’ 구도를 연출했는데 나는 진짜… 모르겠다. 나한테는 그 연출도 대사들도 다 너무 구렸다.) 또한 OTT와 숏폼이 대중화된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는 딱히 ‘서민적인’ 체험으로 간주되지 않을 수 있다. 최근 국내에서 극장에 방문해 영화를 보려면 평일 2D 기준 약 1,3000~1,5000원(CGV의 브런치&일반 시간대 가격)을 내야 한다. 티켓값이 최저시급보다 높다. 미국도 점점 영화 티켓값이 오르고 있는데, 스태티스타 통계에 따르면 2021년 미국의 티켓값 평균은 9.57달러(https://www.statista.com/statistics/187091/average-ticket-price-at-north-american-movie-theaters-since-2001/)로 약 12,000원이었다. 영화관 규모가 크거나 특별관이면 당연히 더 비쌀 테고 앞으로도 티켓값은 오르면 올랐지 내릴 일은 없을 것이다.


영화 티켓값이 정말로 값싸서 부담이 없었기에 대중이 극장에 더 쉽게 찾아가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그렇다고 그 시절 영화 제작자들이 정말 대중을 위해 봉사하듯 영화를 만들었는가?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할리우드 상업영화 제작자들은 말 그대로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돈 벌기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는가? 티켓값이 싸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의 기회를 열어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화가 연극보다 더 위대하고 숭고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영화가 훌륭한 예술이라고 생각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예나 지금이나 영화는 대중에게 오락거리로 받아들여진다. *작가, 비평가, 대중연설가이자 마틴 스콜세지의 오랜 친구인 프랜 리보위츠(Fran Lebowitz)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영화가 정말 그렇게 대단하고 진지한 예술이라면 오렌지맛 탄산음료와 젤리를 파는 데서 보여준다는 게 조금이라도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브로드웨이로 가서 로터리 시스템을 이용하면 유명한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을 약 7~80%가량 할인된 파격적인 금액으로 감상할 수 있다. 과연 연극은 늘 부유한 자들만의 전유물이었을까? 브로드웨이 공연장에 앉아 연극을 보는 사람들은 다 중산층 이상 엘리트들일까? 애초에 영화와 연극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형태의 예술이고, 업계 규모도 다르고, 시장도 다르고, 상품으로서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판매 전략(브랜딩&마케팅)도 다르다.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대체 왜 잭은 유치하게 영화와 연극을 한데 엮어 ‘무엇이 더 위대하고 멋진 예술인지’ 논하려 하는가? 잭이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그의 열등감, 아집, 부족한 지성 및 통찰력을 대변할 뿐이다. *『나, 프랜 리보위츠』, 프랜 리보위츠 저, 우아름 역, 문학동네, p.277


잭은 죽기 직전까지도 호화로운 파티장에 있었고, 좋은 정장을 입었고, 역시나 재혼한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였고, 속깊은 이야기를 나눌 친구(페이)가 있었고, 자신에게 정중한 말투로 살갑게 대해 주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상황이 훨씬 절망적이었던 넬리나 아예 할리우드에 발 붙일 수 없게 되어 쫓겨나다시피 떠난 페이를 떠올려 보면 백인 남성인 잭은 상대적으로 훨씬 나은 처지였다. 조용히 혼자 휴가라도 떠나서 인생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꾸려 갈 것인지 진지한 고찰을 할 기회가 있었다. 카운슬러에게 상담을 받을 수도 있었고, 마누엘처럼 또다른 사업에 눈을 돌려 제 2의 삶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엘리노어가 뭐라고 말하든 간에 그는 영화 업계에서 재기할 가능성도 있었다. (사실 ‘당신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엘리노어의 단정적 선언 역시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엘리노어와 잭의 대화 장면 자체도 정말 작위적이다. 두 인물 사이에 실제적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기보다, 감독이 엘리노어의 입을 빌려서 존경하는 고전 배우들을 찬미하고 지금보다 좀더 ‘이전 세대’에 뿌리를 둔 원로 배우 브래드 피트에게 헌사를 건네는 것처럼 보였다. 단지 그 목적만을 위해 설계된 장면이다.)


잭은 넬리와 달리 목소리도 좋고 변화에 유연한 태도를 보여서 유성 영화 시대에 적응할 조건을 갖춘 배우다. 어떤 배우들은 오랫동안 관객에게 잊혔다가 갑자기 다시 주목받아 스타가 되기도 한다. 잭이 그런 배우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잭을 연기한 브래드 피트는 오랜 기간 할리우드의 정점에 머물고 있는 스타다. 그가 데뷔한 이래 지난 30년간 영화 산업은 기술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무수히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이 노련한 배우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다른 많은 스타들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스캔들 또는 논란과 관계 없이) 계속 스크린에 등장해 왔다. 영화 속 잭도 충분히 브래드 피트처럼 시대를 거듭해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배우 같은데 ‘내용 전개상 과거의 영광을 안고 죽어야 해서’ 운명론적으로 죽는 느낌이 강했다. 나는 비극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잭의 비극은 다소 가냘픈 멜로드라마처럼 느껴져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았다. 내가 영화를 본 상영관에서는 잭의 최후 장면에서 실소하는 사람과 눈물 흘리는 사람이 공존했다.



착각과 자각 - 무너지는 환상의 탑



넬리가 마누엘을 ‘매니’라 불러 준 순간 마누엘은 “야, 거기 너! 멕시코 애!”에서 ‘매니’가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인정받는 프로듀서가 된 마누엘은 인종적 정체성이 느껴지는 이름 ‘마누엘’ 대신 넬리가 자신을 부르던 애칭 ‘매니’로 스스로를 재정체화한다. ‘마누엘’이 무시당하고 핍박받던 이민자 잡일꾼이었다면 ‘매니’는 그가 늘 원하던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본질적으로 늘 자기 자신이었던 넬리와 달리 마누엘은 언제나 환상을 좇는 사람이었다. 그는 잭 콘래드가 일하는 중에 지나치게 음주해서 비틀대는 꼴을 보며 환멸을 느끼다가도 카메라가 돌아간 순간 잭이 갑자기 180도로 돌변해 스크린 속 왕자님이 되자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만약 잭이 조금만 술을 더 마셔서 뻗어 버렸다면, 비틀대다 넘어지기라도 해서 시간이 지체되었다면, 촬영은 엎어지고 마누엘이 죽을 고생을 해서 구해 온 카메라도 무용지물이 되었을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 잭은 명백하게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 (직업 의식이 투철한 배우라면 대기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현장에 바로 투입될 수 있게 준비하지 술을 퍼마시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마누엘은 잭을 경외한다. 그가 탁월하게 ‘연기’했다(=완벽한 환상을 만들어냈다)는 바로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하지만 마누엘이 과연 잭 콘래드의 삶과 현실에, 그의 고독과 상실감에 관심을 가졌을까?


마누엘은 같은 유색인종인 페이를 업계에서 쫓아내고 시드니에게 모욕을 주는 데도 일조한다. 넬리를 돕기 위해서, 촬영을 무사히 끝내고 다른 출연진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 명분은 그럴싸하다. 하지만 그는 정작 그가 정말로 아끼고 소중히 여겼던 넬리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넬리가 자기파괴적 행보를 거듭하며 골칫거리가 될 때마다 넬리에게 실망하고 화를 낼 뿐 그녀가 정말 왜 그러는지 모른다. 넬리는 분명 자기 입으로 마누엘에게 말했다. 잠이 오지 않거나 외롭거나 등등, 감정적으로 불안할 때 도박을 한다고. 마누엘은 넬리의 불행한 가정사도 살짝 엿보았다. 그러나 마누엘이 정말로 넬리의 아픔과 넬리의 공허감과 넬리의 괴로움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넬리가 누군가를 정말로 필요로 할 때 과연 마누엘은 넬리 곁에 있었을까? 넬리가 다른 많은 남자들과 자고 다닐 때 마누엘은 속으로 좌절감을 삼키며 질투했을 것이다. 하지만 넬리가 성적으로 방종한 이유가 정말 단순히 헤퍼서였을까? ‘걸레’ 소리를 들으면서 남몰래 울던 그녀가 정말 늘 그렇게 소비되고 싶었을까? 마누엘이 과연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넬리와 대화하려 시도해 본 적 있을까? 그는 그저 스튜디오의 요청에 따라 넬리를 숙녀로 교정하려 했다. 그럴싸하게 연출만 하면 넬리가 다시 잘 팔리는 상품이 될 줄 알았다.


처음 만난 파티에서 마누엘은 넬리를 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넬리는 그때도 마누엘 대신 다른 남자와 키스했고 마누엘보다 먼저 영화 업계로 뛰어들 기회를 손에 넣었다. 넬리는 마누엘이 마침내 고백할 때까지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마누엘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마누엘은 애초부터 넬리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넬리가 그를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마누엘은 ‘매니’가 됨으로써,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프로듀서가 됨으로써, 넬리의 이미지 변신을 도와줌으로써, 죽을 위기에 처한 그녀를 데리고 도망침으로써, 그녀의 사랑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마누엘의 환상이었다. 그리고 환상은 끝내 마누엘을 배신한다. 마누엘은 LA의 가장 은밀한 장소이자 심연인 ‘배설구’를 방문한 뒤 마침내 그가 늘 선망했던 꿈과 환상의 세계 할리우드로부터 도망친다. 마누엘이 뒤늦게 똑바로 마주한 현실은 너무나 끔찍하고 위협적이라 환상을 압도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50년대에 다시 LA로 돌아온 마누엘은 멕시코에서 얻은 아내와 가정을 이루었으며, 뉴욕에서 라디오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건재한 키네스코프 픽쳐스 정문 앞에 서서 감상에 잠긴다. 아내가 추억을 만끽하라고 딸과 함께 자리를 피해 주자 내친 김에 영화관까지 방문한다. 그는 그곳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를 우연히 관람하게 되고(마누엘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20년대 할리우드를 다룬 영화다) 지난 세월들과 사라진 사람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카메라가 노골적으로 <시네마 파라다이스>를 오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걸작의 결말에 버금가는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마누엘이 토토처럼 정감 가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바빌론의 불빛에 이끌려 들어간 부나방이었고 현실에 안주한 지금도 그 환상을 떠올리면 감격해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촬영장에서 처음 잭 콘래드가 연기하던 모습을 벅찬 얼굴로 바라보던 시절과 변한 게 하나도 없다. 그가 토토만큼이나 영화를 사랑했을 수는 있겠으나, 토토는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사람이며 마누엘은 아니다. 두 사람은 삶의 행보도 영화를 대하는 관점도 매우 달랐다. 엔딩에서 처한 상황은 엇비슷할지라도, 마누엘의 감정에는 공감하기 힘들었다. (넬리 때문에 트러블에 휘말리지 않았다 해도 마누엘은 영화감독이 될 수 없는 인물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마이브리지의 경주마와 멜리에스의 <달나라 여행>을 지나 <오즈의 마법사>와 <터미네이터>를 거쳐 다시 <바빌론>까지 회귀하는 엔딩 시퀀스는 마구잡이로 폭주하며 관객의 시각을 자극해 뒤로 갈수록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 불편할 정도였다. 업계의 역사와 기술과 악덕과 환상과 향락과 기타등등 모든 것이 마누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는 연출인데, 알겠다. 감독이 영화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도 알겠다. 마지막에는 거의 감독이 내 귀에다 대고 영화를 사랑한다며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그 말을 하기 위해 러닝타임과 결말을 연장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도 영화를 정말 좋아하지만 내가 받아들이기엔 좀 과하고, 작위적이고, 설교적인데다, 정신까지 없는 결말이었다. 오프닝 시퀀스가 야심만만했던 만큼 다소 용두사미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비슷한 소재(영화 산업)를 다룬 영화 중에 조던 필의 <놉>이 있는데, 내 취향이 아니었으나 소재를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여내 연출하는 방식은 <놉>이 나았던 것 같다. <바빌론>을 보면서 락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노래 <Californication>이나 <멀홀랜드 드라이브>, <LA 컨피덴셜>, <선셋 대로>, <부기 나이트> 이런 영화들이 떠올랐다. <재즈 싱어>나 <사랑은 비를 타고>, <시네마 파라다이스> 같은 고전 명작들은 아예 작중에 거의 대놓고 오마주로 등장하니 (특히 <사랑은 비를 타고>나 <시네마 파라다이스> 정도는) 미리 관람하면 <바빌론> 감상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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