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어, 영주권, 그리고 직장
얼마 전 모 방송에서 스웨덴 사람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을 봤다. 한국에 산 지 5년 되셨다고 했는데 한국어를 너무 잘하셔서 놀랐다. 한국어는 유행어도 많고 표현도 복잡해서 어려웠을 텐데, 새삼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스웨덴에 온 지 곧 5년이 되네? (8월 말이 되면 5년이다). 2016년 8월 웁살라 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했을 때가 생각이 난다. 그 당시 내 머릿속은 꽃밭이었는데,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위험한 생각으로 신나게 목표를 설정했었다. 그 당시 잡았던 목표는 1) 몇 년 안에 스웨덴어 유창해지기, 2) 취업 비자로 취업, 3) 5년 안에 영주권 받기 등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땐 뭘 모르고 아무거나 있어 보이는 목표로 질렀던 것 같은데 지금 목표들을 봐보면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왔던 The secret이 맞는 건지 정말 거의 다 이뤄져 있다 (다.. 다는 아니다).
내가 스웨덴어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2017년 여름, 6월부터다. 그 전에도 슈퍼에서 물건 사기 등은 스웨덴으로 했지만 슈퍼에서는 영수증 받을래? 할 때 Ja/Nej (응/아니), 혹은 Tack (감사 표현) 정도만 했었기에 뭘 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유학생 초기에 스웨덴어를 마스터하자는 다짐은 영어가 주는 편안함과 학업 및 귀차니즘에 밀려 사라져 갔고, 그 쯤 내 파트너를 만났다. 스웨덴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하는데, 내 파트너는 다른 스웨덴인만큼, 혹은 그보다 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얼마 전까지 나에게 영어로만 말을 걸어서 내가 스웨덴어로 하라고 성화를 내야 스웨덴어로 했던 그런 사람... 이런 내 파트너도 스웨덴 사람들 옆으로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스웨덴어로만 이야기한다. 연애 초기에 부활절을 맞아 파트너의 부모님 집에서 4박을 묵었는데 가족들은 나에게 말을 걸 때를 제외하면 모두 스웨덴어로 대화를 했고, 나는 그 기간 내내 묵언 수행을 했다. 여기에다 거의 100% 스웨덴 사람들인, 지금은 나의 친구들이기도 한 파트너의 친구들은 나와 대화할 때는 영어로 해주었지만 (지금은 100% 스웨덴어), 그 외에는 무조건 스웨덴어였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스웨덴어를 하는데 영어로 말을 걸며 무슨 말하고 있었어?라고 인터셉트하기엔, 그 당시 나는 많이 소심했다. 결국 초기 6개월 동안은 여기에서도 묵언 수행을 했다.
긴 묵언 수행으로 많이 서러워진 나는 독하게 마음먹고 스웨덴어를 시작했지만, 지나고 보니 반은 공부, 반은 농땡이를 쳤다. 3개월 공부하면 3~4개월은 쉬어주고, 6개월 공부하면 그 후 6개월 동안 농땡이 피우는 식으로 말이다. 배울 때는 나름 열심히 해서 진도는 빨랐는데 중간중간 농땡이를 피우니까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스웨덴어를 쉬다가 못해 놓고자 할 때면 이민청 문제, 스웨덴 회사 인턴 등 스웨덴어 쓸 일이 생겨서 계속하게 됐다. 스웨덴어 배운 지 딱 1년 될 때 스웨덴 공기업에서 인턴을 했는데 (당연히 스웨덴어로 일함), 지금도 그때는 어떻게 일을 했나 모르겠다. 지금 내 수준은 소위 '유창'하다고 하는, 스웨덴어로 일하고,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이다. 얼마 전에 길거리에서 스웨덴 라디오 프로그램 즉석 인터뷰도 했는데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무사히 끝났다. 분명 내 스웨덴인 같지 않은 억양을 듣고 왔을 텐데, 나에게도 인터뷰를 청해준 그분에게 감사 아닌 감사를 전한다. 사실 엄청 당황했는데, 인터뷰가 끝난 직후 친구가 옆에서 조용히 '너 인터뷰하기 싫어 보였어'라고 했음. 지금은 올해 목표였던 스웨덴어 고등학교 3학년 과정을 끝내고 *스웨덴어 교육 과정 끝* 신나게 농땡이를 피우는 중인데 삼보가 스웨덴어 책을 네 권이나 생일 선물로 주고, 스웨덴 가족들에게 스웨덴어 책을 열 권이나 받는 바람(?)에 다시 스웨덴어와 마주할 예정이다.
처음에 스웨덴에 왔을 때 취업 비자받기를 목표로 세웠던 이유는 그 방법 외에는 졸업 후 스웨덴에 남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 파트너, 소위 스웨덴어로 삼보 (Sambo)라고 하는 친구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도 상황은 같았다. 스웨덴은 결혼한 부부, 동거 파트너를 위한 비자 제도가 있지만 이 제도는 안정적인 직업이 있는 스웨덴 파트너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둘 다 경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당시 나랑 삼보는 둘 다 학생이었고 내 삼보는 나보다 졸업이 늦었기에 다시 롱디를 하지 않으려면 (이미 삼보가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와서 1년 롱디를 했다) 내가 취업 비자를 받고 취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스웨덴 역시 취업비자를 받기 어려운 나라고 직업 인터뷰에서 비자가 있냐고 질문을 받으면 그 인터뷰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회사에서 비자가 없어서 떨어뜨린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나의 경우 친한 친구가 있는 회사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 면접관이 비자가 있는 다른 사람을 뽑았다고 하면서 떨어진 이유를 그 친구에게 말해준 것을 전해 들었을 뿐이고, 다른 회사 면접에서도 비자가 없다고 말할 때마다 그 단계에서 모조리 떨어졌을 뿐이다*. 뭐, 면접관 입장에선 비슷한 사람이면 추가적인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비자 문제가 없는 사람을 선호할 수도 있다. 거기에다 스웨덴은 비자 신청 자체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비자 신청 결과가 나오는 데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최소 6개월에서 길게는 2년 가까이 걸리는 나라가 아닌가.
그렇게 비자를 이유로, 혹은 경험 부족을 이유로 면접에서 떨어지다가 전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설명하자면 길지만 내 노력, 그리고 운으로 WHO가 코로나 대유행을 선언하던 작년 3월, 취업 비자를 받고 들어간 회사는 코시국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천만다행으로 삼보가 문을 닫기 전에 취업을 했고 이를 기반, 2020년 10월에 영혼을 갈아 넣은 파트너 비자 신청을 했다. 이미 이민청 관련해서는 많은 경험이 있는 나는 내 스웨덴 가족들의 첨삭을 받으며 (지원서류나 레터는 모두 스웨덴어로 썼다. 약 10일 동안 머리 깨지는 줄 알았다) 증거 및 서류들을 첨부해서 비자 신청을 했고 결과를 기다렸다. 나의 경우, 전 직장 일을 그만두고 얼마 안 돼서 재취업을 해서 그 서류도 업데이트해서 줬고, 이를 위해 담당관과 통화도 했었다. 그렇게 약 7개월이 지나갔다.
매일 이민청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며 내 status를 확인하던 차, 결정이 떨어졌단 메시지를 봤다. 그걸 보자마자 이민청에 전화를 걸었다. 내 사회보장 번호와 이름을 알려주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직원이 내 케이스를 열고 읽는 그 몇 초간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던 것이 기억난다. 이민청 직원한테 축하한다, 영주권이 나왔다는 소리를 듣자 목이 매기 시작했다. 간신히 고맙단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엉엉 울었다. 나는 주변 이민자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다이내믹한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았는데, 이에 9할은 비자 문제 때문이었다. 비자 문제 때문에 겪었던 각종 서러움과 그 끝에 받은 영주권만 생각하면 지금도 코 끝이 찡해질 정도다.
외국 생활해보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비자랑 취업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외국인이 취업을 하려면 비자가 필요한데, 비자를 얻으려면 취업을 해야 한다. 무슨 경력 있는 신입이냐고.... 나는 보통 사회 초년생 한국인이 한국에서 취준을 할 때와 비자가 없는 사회 초년생 한국인이 외국에서 취준을 할 때를 많이 비교하는데, 비자 없고, 경력 없는 외국인이 취업해서 비자 얻기는 그만큼 어렵다고 생각한다. 물론 비자가 있다고 해서 취업 난이도가 최상에서 하가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난이도가 최상에서 중상 정도로 바뀐다고 본다. 내가 지금 직장으로 바로 취업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비자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 직장에서 했던 일과 비슷한 일을 할 사람을 뽑는 자리에 지원해서 좀 더 쉽게 취업한 것 같긴 하다. 하지만 (현 직장의 경우) 비자 문제가 없는 사람을 뽑는다고 했기에, 비자가 없는 사람은 아예 지원도 못했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하게도 내가 스웨덴에 처음 와서 세웠던 목표를 대강 이루긴 이뤘다. 물론, 다른 자잘한, 이루지 못한 목표들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3가지를 이뤘으니 일단 만족하려고 한다. 지금도 고민이나 걱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 년 전에 비하면 정말 가벼운 고민거리나 걱정들이 대부분이다. 현재 고민거리는 어떻게 하면 스웨덴 사회에 녹아들고, 내 주변 스웨덴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까 이다.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럽긴 하지만, 스웨덴 내에서 내 위치가 스웨덴어를 하는 한국 사람이기보다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잘 아는 스웨덴 사회에서 내집단에 가까운 그룹이어야 살기에는 더 편할 테니까.
이와 관련된 올해 남은 목표가 스웨덴 운전면허 취득인데 (한국 운전면허증은 안 통한다) 면허 시험 결과가 어떻든 간에 공유해보겠다. 한국 면허는 장롱 면허에 아직 이론은 시작도 안 했으니 시간은 꽤 걸릴 것 같다...
Credit: Strawberry cake, photo by Lieselotte van der Meijs (Imagebank Swe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