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관계가 성장일 필요는 없다.

회피는 도망이 아닌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

by Heeptide

우리 회사는 워라밸도 좋은 편이고, 공기업이라 관리 중심의 업무가 대부분이다.

업무 강도는 높은 편이 아니지만, 입사 3년 차에 완전히 다른 종류의 고난이 나를 찾아왔다.

처음으로 ‘나르시시스트 상사’를 만난 것이다.


그 사람은 교대근무만 전전하던 차장이었고, 타인의 피드백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그를 이해하려 애쓸수록, 나는 점점 내 감정을 잃어갔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신경이 곤두서고, 퇴근 후에도 그의 말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처음 느꼈다. 일보다 사람을 견디는 게 훨씬 어렵다는 걸.


아니, 단순히 어렵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일로 결국 정신건강상담까지 받게 되었다.


그 사람을 상대하며 나는 내 안의 여러 모습을 마주했다.

끝까지 이해하려는 나,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는 나, 그리고 결국 지쳐버린 나.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모든 관계가 성장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는 걸.


나는 이 사람을 만나고 나서 회피도 용기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만 그 회피는 인정 이후의 회피여야 한다.

그가 만든 실수는 내 실수가 아님을, 설득이 불가능한 사람도 있음을,

그리고 세상의 모든 관계에는 ‘좋은 해결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결국 나는 용기를 내어 사내 고충을 공식적으로 이야기했고,

그 차장은 다른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제야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예전에는 모든 인간관계를 ‘배움의 과정’으로 여겼다.

하지만 어떤 관계는 배우는 게 아니라 놓아야 하는 과정이 된다.

그걸 인정하지 못하면, 내 에너지는 끝없이 소모되고 삶의 중심이 무너진다.


그래서 나는 이제, 부딪히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선다.

그 거리가 나를 지켜주고, 때로는 새로운 시야를 만들어준다.

모든 관계가 성장으로 끝나지 않아도 괜찮다.

그 안에서 나를 잃지 않았다면, 이미 충분히 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