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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Mar 31. 2022

일과 부업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볼로냐의 시장 골목에서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곳은 어느 정육점 앞이었다. 나는 그 가게에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한 걸 보고 문득 그 가게에 관심이 생겼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정육점에 들려 고기 한 덩이를 사서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 마치 세상 모두에게 이 정도 소박한 행복은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내 모습은 들키면 안 되는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가게에 잠깐 손님 발걸음이 뜸할 때면 정육점 주인이 나와서 주위 상인들과 대화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손톱만큼의 걱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의 행복한 표정이 부럽다고 생각하다가 뜬금없이 저 가게가 저 사장에게 부업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분명히 좋아서 하는 일일 것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부모의 국적이 다른 사촌 조카가 있다. 그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나라를 다니며 살아야 했던 까닭에 영어를 주로 쓰고 한국어는 잘하지 못한다. 그런 아이가 어느 날 내게 물었다. “삼촌, 지금 무슨 일 해요?”그녀는 내게 work라는 단어를 써서 물어보았고 나는 그 아이가 내가 지금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가 보다고 이해했다. “응, 삼촌은 지금 몇 가지 작업을 하고 있는데, 다 글을 쓰는 일이야.”  하지만 나의 답을 들은 그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내게 되물었다. “삼촌이 하는 개인 작업 말고 진짜 일 말이야, 일!” 아이는 다시 내게 work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물어보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러니까 조카가 물어본 일이란 ‘생계를 위한 돈을 버는 어떤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어."라는 말을 하는 건 그저 취미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조카는 어떤 일을 해서 다른 누군가로부터 보수를 받거나 물건이나 서비스를 판매해서 돈을 버는 사업 같은 것만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위한 어떤 일을 해주고 돈을 버는 걸 물어본 거니?”라고 다시 물어보니 그 아이는 맞다고 했다. 난 뭐라고 답해야 할까 잠깐 생각을 한 후 대답해 주었다. “삼촌은 내 시간의 대부분을 내 작업을 위해 쓰지만 종종 부업으로 다른 사람들이 내게 의뢰하는 여러 가지 다른 비즈니스 문서 작업 같은 것도 해. 그런 부업으로 돈을 벌곤 해. 현재는 그게 네가 의미하는 나의 work인 것 같아.” 조카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삼촌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구나. 삼촌은 부자야?”라고 물었다. 나는 더 이상 대답해줄 수가 없어서 웃어버렸지만 그날의 대화는 나를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아이에게 job이란 단지 돈을 버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고 work은 그 job을 위해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을 하는 이유와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이가 인식하고 있는 work에 포함되려면 어떤 일을 하든 그 일로 인해 지금 돈을 벌고 있는 중이어야 한다. 일을 하고 있지만 돈을 벌고 있지 않다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단순한 영어와 한국어의 의미의 차이 일까, 아니면 직업과 일에 대한 개념의 세대차이 일까. 아니면 그동안 나 혼자 일이란 무엇인지 오해하고 있었던 걸까. 


많은 창작인들이 그야말로 먹고살기 위해 부업을 한다. 작가가 서점을 하고, 화가가 카페를 하고, 음악가가 주점을 하고, 배우가 편의점 알바를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work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우린 그들의 직업을 서점 주인, 카페 주인, 주점 주인, 편의점 알바라고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조카에게 이렇게 얘기해 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삼촌이 하는 일은 나중에 수입이 들어오거나 어쩌면 나중에도 수입이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글 쓰는 게 내 일이야.”  


또 다른 조카는 그 아이가 어린 시절에 어디론가 떠나려는 내게 “삼촌, 시 쓰러 가세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아이의 그 말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어떤 어른 가족이나 친구도 길 떠나던 내게 그렇게 물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천진난만한 조카의 그 말이 참 고맙지 않은가.  시인에게 시 쓰러 가냐고 묻는 것은 어쩌면 그저 가장 당연한 질문이어야 하는데도 나는 어떤 어른에게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른들의 대화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달라진다. 언젠가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다가 가까운 후배가 작업실에서 사흘을 굶고 있길래 밥을 사주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후배 작가의 생계를 걱정하신 어머니가 그 친구는 직업도 없냐고 내게 물으시는 것이다. 어머니는 걱정하는 마음에 하신 말씀이었지만 직업이 없냐는 그 말이 내 심기를 건드렸다. 나는 갑자기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화가면 화가가, 작가면 작가가 직업이지 그럼 뭐가 직업이란 말인가. 다른 직업이 또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나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중얼거렸다. '시인에게 시가 부업이라는 세상, 화가에게 그림이 부업이라는 세상, 음악가에게 음악이 부업이라는 세상, 작가에게 창작이 부업이어야 한다는 그런 세상. 그러니까 당신은 그렇게 살아요. 내가 당신의 삶을 강요하지 않을 테니 내 주업을 부업으로 내 부업을 주업으로 착각하지 말아요.' 하지만 작가가 부업 없이 지속적인 삶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현실을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자신과의 타협에서 빨리 벗어나지 못하면 끝까지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진짜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A를 하기 위해 B를 한다. 당장에 A만 해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B를 하는 동안 A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A를 하기 위해 B를 하는 시간을 줄인다. B를 하는 시간을 줄였더니 이젠 자신은 물론 어느새 생긴 책임져야 할 사람에게 최소한의 생활 보장도 힘들다. 사람들은 B를 줄여서 얻은 시간 동안 또 다른 B가 없을지 고민할 뿐 A는 여전히 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A를 잠시 잊고 딱 일 년만 B를 해서 돈과 여유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그렇게 열심히 B를 하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리니 이십 년이 지났다. 가슴이 철렁해서 모든 걸 내려놓고 지금이라도 A를 하려 하지만 왜 그런지 이젠 A만 해서는 더욱더 살 수가 없다. 그의 곁에는 그만큼 그가 B만을 해주기를 원하는 사람이 더 늘어나 있기 때문이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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