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서 Mar 31. 2022

계절 연인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눈을 감아도 볼 수 있는 게 있어. 이를테면 숲이라든가 바다라든가 또...


그녀의 손끝에서 잘린 양파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그녀의 손은 희고 길고 가늘다. 저 손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저런 손은 생산적인 일은 할 필요 없이 그저 남자에게 한 번 슬쩍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혁명적이지 않을까. 그런 손이 양파나 썰고 있다니. 적어도 저런 손가락은 매끈한 매킨토시 컴퓨터 키보드 위에서 딸깍딸깍 소리를 내거나 멋진 카메라 셔터 위에 올려져 있어야 하지 않냐 이 말이다. 그녀는 양파를 썰면서 말했다. "이를테면 숲이라든가, 바다라든가 또... 어떤 사람이라든가."


그녀의 손끝에서 떨어져 나가는 둥그런 양파 조각들이 신부의 부푼 드레스처럼 보였다. 저 매끈한 손으로 치마를 한 꺼풀씩 벗겨내고 있는 것이다. 톡톡톡 가벼운 나무 소리와 함께 도마 위에 툭툭 떨어지는 하얀 드레스. 저러다 식칼에 손가락이 베이면 저 하얀 드레스에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겠지. 문득 끔찍한 생각을 했다 싶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몇 년 전 티 없이 맑았던 날, 베란다에 쓰러진 사람처럼 일광욕을 즐기던 그녀의 무심한 표정이 생각났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봄빛을 옮기는 손처럼 그녀의 손목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도마 위에서는 여고생의 구두 소리처럼 경쾌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주스 더 줄까?" 총총걸음으로 복도를 지나는 여고생을 상상하고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보지 않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틀어놓은지 몰랐던 라디오 소리 같았다. '아, 미안해. 후, 날이 더우니까 막 졸린다."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낸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구식 라디오를 켰다. "테레비는 정신 사나워." 날이 더워서 팔딱팔딱 뛰진 않았지만, 그녀와 난 서로 마주 보고 웃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 저 미소 때문에 여러 남자 인생 망쳤지. 난 다행인 걸까 불행인 걸까. 그날 바다에서 이 음악을 들을 때도 그녀 곁에는 늘 누군가 있었다. 우린 제목도 알지 못하는 음악이 바다와 우리들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흥얼거렸다. 


"이런 날엔 니스에 가고 싶다. 그치? 그런데 그 아이 있잖아. 그 앤 지금 뭐하며 살아?" 난 조심스럽게 그 아이의 소식을 물었다. 혹시나 해서.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창 밖에는 진짜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대답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아, 날도 더운데 주스보다 맥주 마시고 싶다. 시원하게!" 그녀의 고양이가 내 발 앞에서 날 바라봤다. 눈웃음을 지어주니 냉큼 뛰어올라 무릎 위에 자리를 잡는 고양이. 이 더운 날에도 이런 애교라면 참을만하다. 난 녀석의 웅크린 몸을 쓰다듬으면서 문득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찰랑찰랑 소리가 날 것 같던 그 아이의 머리.


그녀는 접시 위에 양파를 가지런히 펼쳐 놓고 식초를 뿌렸다. 시큼한 식초 냄새가 방안에 퍼졌다. 그녀는 식초를 뿌린 양파 조각을 한입 물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발전소의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고 눈썹이 살며시 흔들렸다. 바다를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어떤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우리는 그해 햇살 찬란했던 바닷가를 추억하며 양파 조각을 먹었다. 반짝이는 니스의 날씨와 의외로 맛이 없던 시저 샐러드, 잡힐 것 같이 선명한 뭉게구름, 택시 기사의 레이벤 선글라스 등 우리 둘에게는 둘 다 똑같이 기억하는 순간들이 많았지만 바닷가에서 만났던 그 아이에 대해서는 둘 다 쉽게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는 마치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기듯 그날의 일들을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이 정확한 기억인지는 둘 다 알지 못했지만. 창밖에서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하얀 포말 속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던 그 아이의 목소리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발전소의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꿈을 꾸는지 그르릉거렸다. 얼음이 녹은 물컵에서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손끝으로 물방울을 만졌다. 그 해 여름 그 아이의 손처럼 차다. 나는 갑자기 헛기침이 나왔다. 양파를 다 먹고 나는 심부름을 마친 이웃집 꼬마처럼 그녀의 집을 빠져나왔다.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가슴까지 올라오던 파도 속에서 그 아이가 내 손을 잡았었다는 걸. 식탁 위에는 그녀도 나도 먹지 않은 양파 한 조각이 남았다. 끝내 맛을 보면 안 되는 비밀처럼.


 

/ 글, 사진. 희서



        

매거진의 이전글 라디에이터를 켜 둘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