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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Dec 12. 2024

그것은 좋은 이별이었을까

경우에 따라 달라서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은 비교적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많이 소통하게 되는 듯 싶다.  또한 그래서 아내와 헤어지면서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또 내가 힘들 때 나를 가장 많이 위로해 주었던 건 같은 상황을 겪었던 형들이었다. 지금 헤어지는 과정 중에 있는 친구의 연락을 받는 게, 처음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친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를 그나마 내가 가장 잘 알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협의이혼을 신청하러 가서 놀랐던 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원만하게 협의로 이혼한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그것보다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혼한다는 것이 놀라웠던 것 같지만) 10년도 더 전에 내가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초년생 때의 일이다. 같은 업계에 있는 다른 회사 사람들과의 모임이 있었는데, SK 모 계열사의 직원이 자신 주변에서 겪은 이혼 이야기를 도시전설처럼 이야기해서 정말 흥미롭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같은 모임에 참석한 GS 모 계열사의 직원은 자신이 결혼식 사회를 본 친구들이 너무 많이 이혼하는 바람에, 만약 같은 친구가 다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혼식 사회를 보지 않겠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 도시전설들에서 공통으로 듣게 된 줄거리는 대체로 진흙탕과 같은 결말이었다. 명히 한때는 너무 사랑해서 죽지 못해 결혼했을텐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지막엔 어떻게 그렇게 결론을 맺게 되는지. 아내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내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어주었던 형은 원만하게 협의이혼하긴 했지만,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정말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협의이혼 의사를 확인하는 날에도 전 형수가 그 자리에 아무 일 없이 나올지를 정말 걱정했다고 한다. 다른 형은 전 형수가 너무 빠른 이혼을 원해서 결국 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아마 협의로도 이혼할 수 있었겠지만, 아이가 있었던 까닭에 그러면 최소 3개월의 시간이 필요해서 형수 쪽에서 더 빨리 이혼할 수 있는 법원의 정 절차를 선택했던 것이다. 지금 이혼을 원하는 친구도 결코 그 과정이 쉽지 않다. 친구는 어차피 결론은 비슷할 것이라며 협의로 하자고 전 형수를 최대한 설득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벌써 몇 달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별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나는 아내와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아마 아내는 싫을 것이다. 그리고 점점 하는 말수가 짧아지고 있다는 것도 느낀다. 연락을 꺼린다는 뜻이겠지.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내에게 답장이 오고 연락을 한다는 점에 대해 놀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년쯤 전으로 돌아가 처음 아내와 헤어졌을 때를 돌이켜 보면, 나는 정말 그 단어를 싫어하긴 하는데, 우린 정말 참으로 '쿨'하게 헤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다음 날 아내가 이삿짐을 빼고 별거를 시작하기로 되어 있는데, 돌연 아내가 퇴근할 때쯤 전화를 해서는 저녁을 어떻게 할 거냐며 자신은 지금 퇴근하는데 같이 시켜 먹겠냐고 물었던 그날이. 우리는 이혼을 결정하고 나서도 가사에 있어서 결혼생활을 유지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유지했다. 나는 세탁소에 갈 때면 아내에게 항상 맡길 옷이 없는지 물어보았고, 빨래통에 넣어 둔 옷은 우리 둘 중에 누군가 빨래를 돌리는 사람이 그냥 알아서 했다. 그리고 빨래가 마르면 각자 개어서 전달해 주기도 했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금전일텐데, 그 부분에서도 아내와 나는 별 다툼이 없었다.


지금 나의 주위엔 많은 이혼 동료들이 있다. 그 가운데 실제로 이혼에 이른 사람은 몇 되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행 중이다. 법원을 들락날락하는 사람도 많고, 판결이 나왔지만 다시 항소에 이른 사람도 있다. 상대편 배우자에게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느냐며 분개하고는 하지만, 아마도 그게 이혼의 현실인 것 같다. 재산을 숨기려고 하는 사람과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 소송에서 이길 것이 명확하지만 그럼 또 재산을 받아내려고 다시 또 소송을 겪어야 하는 사람 등등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듯이 별의별 사례가 다 있다. 그 많은 사례들을 듣다 보면, 그래도 나는 아내와 좋은 이별을 한 건가 하는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그 많은 동료 가운데 한 사람에게 지독하게 독설을 들었던 와중에도 유일하게 칭찬받았던 것은 아내를 깔끔하게 보내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말 나는 아내를 깔끔하게 보내주었고, 이별에 좋은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나. 나 스스로를 돌이켜 보다 보면, 회한에 잠기고 힘들어질 때가 셀 수 없이 많다. 우선, 지금 약부터 먹어야겠다.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마 이혼 결심이 서서 내게 말했을 때부터 그 마음을 돌이킬 여지는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나와 함께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가 주었고, 두 달 넘게 같이 상담도 받아 주었다. 아내가 나에게 직접 이야기하기도 했었는데, 아마 아내는 나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포기할 시간을 주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시간이 빨리 왔으면 하고 기다렸을테고. 아내와 마지막 만찬을 하고 재산분할과 관련해 하루밖에 되지 않아서 아내에게 한 엑셀 파일이 도달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작성했느냐고 아내에게 물었더니 아내는 진작에 준비했었는데, 내가 휴직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갈 때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야 내가 덜 힘들 것 같아서. 재산분할에서 아내는 내게 더 많이 주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나 또한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내 입장에서 하는 말이라서 아내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은 그냥 모두 아내가 요청하는 대로 들어주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물은 먼저 집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부분에서도 아내와 나는 깔끔했다. 깔끔했다고 하기에는 내가 치졸했던 것 같다. 살림은 거의 모두 아내가 가져갔다. 몇 가지 아내가 물어보았던 것도 있었다. '이건 네가 가져갈래?' 하고.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그걸 모두 거절했는데, 하나는 역시 양반이라서 좀 더 권할 때까지 기다렸던 면이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아내가 생각날 여지를 아예 없애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결국에 나는 유리컵 다섯 잔만을 챙겨왔다. 아내가 컵이 너무 많다며 네가 좀 가져가라고 했던 까닭이다. 실제로도 결혼생활 내내 아내는 높은 컵을 썼고, 나는 낮은 컵을 썼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이건 내 컵이라는 느낌도 갖지 않았나 싶다. 결국 지금 내가 사는 집에 있는 물건들은 거의 새것이다. 물론 몇 개 없기도 하고, 그래서 대체로 싸구려이기도 하지만. 그런데 가끔은 아내는 우리가 함께 생활했던 때가 묻은 오랜 사물들과 함께 지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치졸하고 좀스러웠나 하는 생각에 미쳐서 끝없는 자책을 하게 된다. 아내라고 해서 우리 둘이 덮던 이불을 덮고 지내고 싶었을까. 그 큰 냉장고며, 오래된 세탁기며, 다 자신이 가져가고 싶었을까. 한 번은 아내가 냉장고나 세탁기나 필요하면 내게 가져가라고 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자신은 아마 오피스텔 같은 데에 들어갈 것이라며. 그때 내가 오피스텔은 전세도 위험하고 웬만하면 꼭 아파트로 구하라고 권유했고, 결국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가게 된 아내는 다시 냉장고와 세탁기와 에어컨이 모두 필요해졌었다. 아내는 지금 내가 사는 집의 한 70% 넓이 정도 되는 집에 사는데, 새로운 출발을 한다고 집 배치도 생각하며 설레했던 모습이 떠오르긴 하지만 좁은 집에 많은 살림을 넣고 답답하진 않았을지 하는 생각에 이르면, 나는 영원히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남들이 보기에 우리는 원만하게 잘 헤어진 것 같아 보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내도 사람이라 더 욕심 내고 싶었던 부분도 있었을 거고, 내게 따지고 싶었던 것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헤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마 다른 자잘한 부분들은 그냥 내게 양보하는 쪽을 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그걸 알고 이용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고, 실제로 나는 마지막까지 모든 걸 양보해서라도 아내를 붙잡아 보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막상 아내와 헤어지게 되었을 때 그때도 내가 그렇게 감성적이었던가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한 번은 후배들과 있는 카톡방에서 어떤 후배가 그런 말을 했었다. '오빠는 겉으로 봤을 땐 정말 F 같아 보이지만, 결정적일 때는 T'라고. 카톡창을 보고 있던 나는 이혼과정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라서, 그 말이 너무 맞는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실제로 아내가 이혼 결심을 돌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아내보다도 먼저 집을 보러 다녔고, 지금 집 계약도 아내보다 먼저 했다. (물론 같은 날이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아내에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뻔뻔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이렇게 일반화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대개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이혼은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리게 되는 단어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내 주위를 돌아보면, '이혼'이라는 단어가 목전에 올라왔을 때는 이미 한 사람에게는 그 결심이 온전히 선 경우인 때가 많다. 아마 상대는 영문을 모를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었는데, 왜? 나와 아내의 경우에는 이혼 이야기가 나왔던 초기와 후기의 상황이 다르긴 했지만, 처음에 아내는 내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자, 또 며칠 저러다 말겠지 했단다.


그러나 상대의 감정은 나와 같지 않다. 나는 지금 당장 결심이 섰고, 오래전부터 마음 먹었으며, 너에게 조금씩 티를 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걸 한 번 경험해 본 나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던 아내에게 지금까지도 정말 감사하다. 실은 그 시간이 아내에게는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가 돌처럼 단단히 이혼을 결심한 뒤에도 우리는 3개월을 같이 살았고, 6개월 가까이 같은 호적에 있었다. 아내는 하루라도 빨리 나와 분리되고 싶었겠지만, 내 마음은 자신의 마음과 같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고, 그래서 내가 그걸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던 것이다. 친구는 당장 이혼하고 싶어 하고, 나는 나름대로 친구가 왜 그렇게 결심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솔직한 내 마음은 (친구에게는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형수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친구는 하루이틀이 아니라 몇 주면 충분한 시간을 준 것 아닌가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건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아내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주었고, 조금 있으면 아내와 이혼이 결정된지 거의 1년 가까이 되지만 아직도 약을 먹고 있고, 병원에 다니며, 이런 글을 쓸 때면 눈물이 흐른다.




마지막에 이사 준비를 하면서 나는 아내에게 결혼 액자와 앨범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아내가 가져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두 다 내가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아내는 자신에게도 일부를 나눠 달라고 했다. 자신의 한때의 삶의 기억이라며. 그래서 우리는 결혼 앨범을 하나씩 나누어 가졌고, 액자는 내가 가져왔다. 아내는 자신 몫의 청첩장도 몇 장 챙겼다. 지금도 그때가 생각난다. 아내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 나는 나와 아내의 결혼생활이 그래도 아내에게서 오려 내고 싶을 만큼 끔찍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내심 정말 반갑고 고마웠던 것 같다. 아내가 그것을 펼쳐 볼 일이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나도 펼쳐보지 않는다.)


완벽하지는 않았고, 헤어짐에 '아름답다'는 말을 붙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숱한 동료(?)들을 지켜보면서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이만하면 우리는 아름답지는 못해도, 좋은 이별은 되지 않았을까. 부디, 아내에게도 내가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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