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식이

by 근근

저녁시간이 되면 아이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와 물었다. "쌤, 쌤 오늘은 뭐 먹어요?" 아이는 노란색 티셔츠를 입었다. 셔츠엔 아직도 나와 어제 함께 먹은 떡볶이 양념이 묻은 채였다. 한여름인데 아이는 같은 옷을 여러 날 입었다.


2011년, 학교 신문사의 편집국장 임기를 마친 나는 아무생각도 하기 싫었다. 휴학을 결정했고, 잡지가 나오자마자 학원에 취직했다. 서울로 나가는 길목에 있던 작은 어학원이었다. 초등학생들한테 매일 '하우 알 유?'나 가르치며 살아야지. 지루하고 심심하게 살 거다, 다짐하며 2주 동안 수습기간(을 빙자한 농땡이 시간)을 보냈다.

끼익. 교실 문을 열고 노란 티셔츠를 입은 깡마른 남자애가 들어왔다. 그 교실엔 나만 앉아있었다. "여기서 컵라면 좀 먹어도 됨?" 나는 눈만 껌뻑였다. 뒤이어 다른 애가 하나 더 들어왔다. 먼저 애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컸다. 양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어... 나 새로 온 선생인데."

아이들은 컵라면을 다 먹고도 교실을 나가지 않았다. 가방에서 꼬깃꼬깃 숙제를 꺼냈다. 한참을 앉아 같이 숙제를 했다. 그런데 한 애가 이상했다. 아니, 두 아이 모두 이상했다. 깡마른 애가 쉴 새 없이 책상을 쳤다. 계속 휘파람을 불었다. 입 장난을 치며 혀로 딱 딱 하는 소리도 냈다. 그렇게 시끄럽게 구는데도 큰 애는 아무 말도 안했다. 둘은 그저 숙제를 했다.

깡마른 아이의 이름은 김민식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쯤 되는 줄 알았는데 5학년이었다. 이틀 뒤 나는 민식이네 반 수업에 참관했다. 민식이는 그저께 본 노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반에서 민식이가 제일 작았다. 4학년 준수보다도 15cm는 작았다. 수업시간에도 민식이의 버릇은 계속됐다. 한 시간 내내 몸을 움직이고 소리를 냈다. 집중이 하나도 안됐다. 수업이 다 끝나고서야 전임이 내게 말했다. "민식이가 틱이 있어요."


민식이는 엄마가 없다. 어렸을 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엄마가 집을 나갔다. 아버지의 가정폭력 때문이었다. 가난 때문이었다. 집에는 가는귀먹은 할머니와 어린 민식이만 남았다. 민식이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민식이를 때렸다. 두렵고 불안한 민식이에게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는 이상한 짓 하지 말라고 또 민식이를 때렸다. 민식이의 버릇은 '틱 장애'가 되었다.

민식이는 집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집은 심심했다. 집에 가면 귀가 어두운 할머니뿐이었다. 아버지는 늘 밤 열시를 넘기고 들어왔다. 엄마 얼굴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바로 달려갔다. 다른 반을 기웃거렸다. 제 수업이 끝나면 옆에 있는 도장에 갔다. 합기도 복을 입고 해가 질 때까지 형들과 놀았다. 밥은 영어 학원의 어린 선생이 사주니 괜찮다. 군것질도 많이 했으니 참을 수 있다. 민식이 주머니는 늘 불량식품으로 가득했다.


밥을 사주며 나는 민식이에게 숙제를 채근했다. 다른 애들에게 하는 것처럼 집에 전화 하겠다 겁을 줬다. 그러면 그 밝던 아이가 하얗게 질렸다. 몇 년 전 민식이네 집안 사정을 모르는 선생이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민식이는 숙제를 하지 않았다. 선생은 민식이네 집에 전화를 했다. 그날 밤 민식이는 일을 마치고 온 아버지에게 맞았다. 할머니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원장은 부모들과의 꾸준한 소통을 강조했다. 하얗게 질리던 민식이 얼굴이 떠올랐다. 일부러 민식이 순서를 건너뛰었다. 상담 전화를 다 돌렸는데도 퇴근시간이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전화를 받은 건 민식이네 할머니였다. 민식이 영어 선생님이에요, 민식이는 아주 똑똑하고 씩씩합니다. 내 칭찬에 예, 예 대답만 했다. 안 들렸나보다. 바로 민식이가 전화기를 바꿔들었다. 전화기 너머의 민식이는 차분했다. 얼마나 겁을 먹은 걸까. 영어듣기 문제를 풀면서도 멈추지 못하던 입 장난이었는데.


나는 그 학원에서 육 개월 동안 일했다. 일을 그만두고 민식이를 만난 적은 없다. 지금도 나는 다른 보습학원에서 자습 감독으로 용돈을 벌고 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보면 가끔 민식이가 생각난다. 육개월을 보았는데 어째 생각나는 모습은 노란 티셔츠를 입고 웃는 모습뿐이다. 손에는 컵 떡볶이를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