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화 VS 비인간화
주거형태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
어느 나라에 여행을 가도 나는 항상 꼭 의식을 치르듯 하는 행위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현지 도시의 로컬 재래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직접 밥을 해 먹는 것이다. 이런 버릇은 타이완에 살게 되면서 더 확고해졌는데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타이페이에서 내가 살고 있는 작은 원룸엔 주방이 없기에 요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열악한 주거 환경에 놓인 타이페이에서 주방이 있고 깔끔한 옵션이 갖추어진 원룸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 자동적으로 고정비용을 줄이기 위해 주방이 없는 형태의 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 무리의 대열에 합류하여 주방이 없는, 오래되었지만 깨끗하고 아담한 곳에서 3년이 넘게 월세를 내며 지내고 있다.
한국에서 부모님 집에서 지낼 때를 제외하곤 기숙사나 호스텔, 호텔 같은 여러 종류의 숙박 형태를 경험해보았지만, 전세나 월세를 내며 자취를 해본 적은 없었기에 정식으로 혼자 방을 둘러보고 계약서를 쓴 곳은 이 곳이 처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렇게 복잡하고 귀찮은 일을 거쳐야지만 이 큰 도시에 내 몸 뉘일 작은 공간 하나를 빌릴 수 있다니, 정말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부모님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서 지금의 집을 마련하게 되었는지, 반평생 이 집 만을 위해 열심히 빚을 갚고 본인들의 삶을 얼마만큼 희생하면서 살아왔는지, 결코 직접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의 주거 방식은 아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그에 따른 변화에 순응하면서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취할 것은 취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하우스 푸어는 되고 싶지 않고, 집을 사기 위해 십수 년을 빚에 갇혀 지낼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거쳐 사회에 나오고 돈을 모으게 되면서, 내가 돈을 모으는 주된 목적은 어느새 '여행'이 되어 있었다. 여행을 위해서 쇼핑을 줄이고 주방이 없는 저렴한 월세의 공간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활 덕분에 나는 그렇게나 돈 모으기 어렵다는 타이페이의 회사 생활에서 월급의 60프로 이상을 저축, 그렇게 3년 동안 열심히 모았던 돈으로 장기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오고 앞으로도 이런 장기 여행을 내가 다시 원하게 될지에 대한 확신이 없게 되면서, 이제부터는 여행 경비만을 모으기 위해 악착같이 저금하기보다, 건강하고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는, 큰 공간은 아니더라도 내가 혼자 사용하기에 무리가 없는 주방이 있는, 그런 조금 더 퀄리티 높은 삶을 선택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심경의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렇다고 감당할 수 없게 비싼 곳보다 지금 내는 월세에서 조금 더 보태서 옮길 수 있는 범위 내에, 회사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으로, 하지만 앞으로 당분간 장기 여행은 포기하는 것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내 연봉을 더 올리는 방향으로 삶의 길을 정하게 되었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좀 더 잘 해내고 승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버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내 삶의 퀄리티를 높이면서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포기할 것은 깨끗이 포기하고 선택한 것에는 뒤 돌아보지 않고 멋지게 잘 해내는 것. 쉽지 않겠지만 혼삶 싱글 라이프를 선택한 이상, 이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