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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Jun 30. 2024

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나만 예외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고통이 온다>

전에 구독하던 뉴스레터 작가님이 최근 덴마크 스반홀름에서 생활한 이야기를 담은 뉴스레터 연재를 시작했다. 최근 뉴스레터에서는 정희진 선생님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느낀 점들로 이야기를 열었다. 지금까지 작가님께 감사란 ”이만하면 다행이지”라는 태도였는데 정희진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감사란 아주 다른 차원이란다. 정희진 선생님은 <나만 예외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고통이 온다>고 한다.


사실 이런 류의 콘텐츠엔 크게 감화되지 않고 관심도 없는 나는 그 뉴스레터에서 두 번째로 소개된 편에 더 눈길이 갔다. <자매애는 없다>. 그래도 책으로만 읽던 선생님의 생각을 음성으로 직접 들어볼 수 있다고 하니 호기심이 생겨 두 유튜브 창을 켜 놓고 다시 딴짓으로 돌아갔다.


딴짓은 딴짓을 타고 흘러가 어쩌다 내 블로그의 예전 글들을 뒤적였다. 서로이웃이 아닌 사람들이 들어오면 어떤 글들이 보일까 하며.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여행 일기들이 지나가고, 곧 그 글들이 나타났다. 고작 1년 전쯤인데 마음으로는 한 10년은 더 된 거 같은 작년의 이야기들. 전세사고, 염증, 질병, 불안, 약, 병원 등으로 정리된 글들. 거기에 눈에 띄는 구절이 보였다. 바로 “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전세사고도 왜 내게 이런 일이, 얼굴의 염증도 왜 내게 이런 일이, 귀의 먹먹함도 왜 대체 내게 이런 일이, 모든 게 왜 대체 내게 이런 일이었다. 작년엔 이럴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이 내 눈에 띈 건 지금의 나도 이렇기 때문이다.


지난달, 토요일이었던 결혼식을 앞두고 일기 예보에서 수목금, 일월화가 맑음인 와중 하필 토요일만 비 소식이 있는 걸 보고 대체 왜 나에게.. 를 입에 달고 살았다. 이탈리아로 떠난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맑아야 황홀한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는 돌로미티에서도 거의 있는 내내 흐리고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보고 왜 대체 나에게?를 외쳤다. 그랬더니 애인이 이윽고 한 마디를 한다. 너 그 생각 되게 이상해. 날씨는 날씨일 뿐인데 왜 자꾸 “왜 내게”라는 말을 해?


질병의 연속성 안에서도, 그걸 낫게 만드는 과정에서도 메타 인지가 충분히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모든 스트레스와 질병은 사람의 취약한 곳을 파고든다. 나도 모르게 내 사고방식이 이렇게 물 들어 버렸다. 왜 내게? 는 습관이 됐다.


다시 정희진 선생님의 팟캐스트로 돌아가서. 가볍게 잠깐 들어볼 요량으로 켠 팟캐스트에서, 선생님은 정확히 이 태도를 지적했다. 많은 이들이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일을 겪냐라고 생각하지만, 선생님은 다시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일을 내가 뭐가 특별하다고 나만 피해 갈 수 있냐고 되물었다. 물론 이 말이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알고 있지 않은가. 남들이 불행을 겪더라도 그 불행이 내 불행을 위로해주진 않는다.


선생님은 이어, 불행에 대한 다른 관점을 가질 것을 제시했다. 그러니까 이 고통은 내가 이제껏 가지고 누렸던 행복에 수반된 거였다고. 예전의 행복과 함께 있던 고통을 지금 겪는 거라고. 내 나름의 언어로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모든 사람은 인생에서 행복한 만큼 고통이 작든 크든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고통이 나를 피해 갈 이유도 없다는 것.


이제까지 나는 좀 더 고통의 특수성에 집착했던 것 같다. 내가 겪은 전세사고나 질병은 인터넷 속 익명들이 아니고서야 주변을 둘러봐도 비슷한 일을 겪은 이를 찾긴 어려웠다. 그랬기에 왜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는 걸 내가 겪어야 하는지 분노했다. 자꾸만 내 안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거나 억울함에 받치거나 했다. 입으론 운명 따위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왜 대체 내게”는 결국 운명에 의지하다 못해 스러지고 마는 태도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학자인 선생님이 왜 이런 운명적인 태도로 치유받았는지 알 것도 같다. 아니 애초에 이것이야말로 운명에 기댄 태도가 아니었을지도. 오히려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내게 닥친 ‘불행’을 메타적으로 인지하는 것인지도. 누구나 인생에서 꼬꾸라질 때가 있고 작고 큰 위기를 겪는 마당에, 결국 중요한 건 “왜 내게”라며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분풀이를 하며 운명적으로 받아 들일 게 아니라, 문제에 의연한 태도를 가지며 문제해결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이제 내 인생에서 “대체 왜 내게”란 없다.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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