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헬레나 Jan 06. 2024

내 남편은 왕자님

“이 남자 왕자야.”

“네에? 왕자요? 전혀 아닌데요…^^;;;”


우리 친정은 천주교 집안이지만 울 엄마는 정기적으로 고민이 생길 때마다 사주를 보신다. 사주를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큰 흐름은 우연찮게도 맞는 것 같고, 힘들고 어려운 일은 피해 가고 참고 견뎌보라고 조언해 주시니 의지가 되시나 보다. 25년 넘게 찾는 곳이니 이제는 말동무 삼아 가끔 들르시는 곳.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시기 위기가 여러 번 있었는데 엄마와 함께 그곳에 사주 보러 갔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사실 외모는 백마 탄 왕자님과는 1%도 어울리지 않는 박지성 닮은 외모에(박지성 님은 실력과 인성이 외모를 더 멋져 보이게 하지만) 개천에서 용 난 인물이라 그런지 매너와 센스도 찾아보기 힘든 남자였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스타벅스에서였다. 나는 카페라테를, 그 사람은 주스를 주문했는데 커피 설탕 넣고 저을 때 쓰는 짧고 납작한 빨대를 들고 와서는 잘 나오지도 않는 주스를 쫍쫍 빨아대고 있는 것이다. 스타벅스 처음 와봤나. 몰라도 뭘 한참 모르는 그 모습이 순수하고 좋았다.


수영도, 스케이트도, 스키도 나를 만나서 다 처음 경험해 봤던 그이다. 연애 시절 캐리비안 베이 파도풀에 갔었다. 파도가 오면 파도에 같이 몸을 맡겨 떠올라야 하는데 파도 속으로 푸~욱 가라앉던 모습. 어떻게 저렇게 되는 거지? 파도가 오면 점프! 점프하라고! 열심히 점프하는데 또 파도 속에 박히는 모습에 안쓰러우면서도 나도 모르게 깔깔 웃음이 나왔다. 스케이트도 스키도 캔디처럼 넘어져도 괜찮아! 하며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수 백번. 여자친구가 즐기는 스포츠니 못해도 따라 하고 같이 하고자 하는 모습이 귀엽고 멋졌다.


우리는 6년 연애 후 결혼했다. 뭘 몰라도 뭐든지 맞춰주는 남자라 그 순수함이 좋아서 결혼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외모도 행동도 왕자와는 전혀 거리가 먼데 이 남자가 왕자라니 무슨 말이지?




결혼 생활 10년 넘게 지나 보니 이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곳곳에서 느낀다. 이 남자는 왕자가 아니라 왕자병이다. 이 말인즉슨, 왕자처럼 대접받기만을 원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연애시절 나에게 다 맞춰주는 듯했던 모습은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신기하고 재밌어서 그랬던 것이고.


아이 낳고서 나의 1순위는 당연히 아이들이다. 그런데 그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계란말이, 소시지 등등 젓가락 날아가며 더 빨리 먹는다. 딸아이가 ‘아빠 왜 저래?’하는 눈빛을 보내면 나는 아빠한테 또 빼앗길라 딸 밥그릇으로 남은 반찬 후다닥 옮겨준다. 아이들 주려고 찬장에 몰래 숨겨놓은 유기농 과자도 밤새 기가 막히게 찾아내 다 먹어버린다. 자식한테 좋은 거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 아닌가. 자기한테는 왜 안 주냐며 투정이다.


친구들 만나 남편 이야기 하던 중, 한 친구가 남편이 밥솥 뚜껑을 맨날 열어놓아서 화난다고 했다. 앗, 그래도 밥은 혼자 떠서 먹는다는 거 아니야? 부럽다. 매번 밥 다 차려놓고 불러야 겨우 나와 밥 먹는 우리 남편인데. 애들 키우며 우리 남편은 아이들 밥 한번 먹여본 적도, 샤워시켜 본 적도, 재워본 적도 없다고 말하니 친구들이 경악하며 결혼 초부터 네가 길 잘못들인 거라며 타박한다.


어렵게 살았던 남편과 시가 식구들은 남편의 벌이가 조금 나아지자 다 보상받고 싶어지나 보다. 어릴 때 혼자 밥 차려먹고 빨래도 했다던 남편인데 지금은 손 하나 까딱 안 한다. 명절이면 아들 결혼 시켰다고 며느리한테 일 다 맡기고 거실에 앉아 TV 보는 시어머니. 몇 년 참고 지내다 폭발했던 어느 날. 명절 때 그거 하나 못하냐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내 속을 뒤집어 놓은 남편. 위기도 많았지만 그래도 참고 견디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사주 봐주시는 분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자기, 40 넘어야 좋아져. 그러니까 참고 견뎌.”


이 남자 왕자병에서 벗어날 날이 오기는 할까요?

왕자 대접 해주고 살면 저도 공주 같은 삶 살 수 있을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마흔 너머의 변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