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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없는 타월을 쓰는 로망

내 취향의 타월을 사는 사치

by Helen

[매거진 : 가난한 프리랜서의 소심한 사치생활]



글씨 없는 타월 쓰는 게 여자들의 로망이잖아요.


어느 날 직장 후배가 했던 이 말이 귓구멍에 와서 박혔다. 타월이 로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남들이 꿈꾸는 로망이라고 하는 것에 부화뇌동하기 싫은 반골 기질을 갖고 있었는데도 그 말이 아무 저항감 없이 나의 로망이 되어버린 것은 그 말의 신박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집에나 다 있고, 누구나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사용하고, 그러다 보니 대체로 함부로 다루어지면서 타월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면 마침내 걸레로 변신하여 고된 생을 살다 가는 타월이라는 것의 존재감을, 그제야 재발견하게 된 놀라움 때문이었다.


부모님과 2남 4녀, 무려 여덟 명이 한 집에 살았던 어린 시절 우리 집의 욕실을 떠올려 본다. 이상하게도 타월의 색깔은 화려한 핑크나 노란색 천지였다. 색이 선명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부분은 세탁기의 모진 고문에 못 이겨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흐리멍덩한 색으로 바뀌어 있었고 거의 모든 타월에 회갑잔치, 산악회, 돌축하, 체육대회 등의 글씨가 궁서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때는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내가 고르지 않은 물건과 풍경’이 집을 채우고 있었다.


글씨 없는 타월을 쓰는 것이 로망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면 다른 집 욕실 풍경도 우리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살림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 남들이 잘 보지 않는 은밀한 욕실 두는 물건 쯤이야 무료로 받는 기념품 타월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변기에 앉을 때마다 회갑잔치 주인공의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읽으면서도, 그 어르신의 얼굴은 전혀 모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형광빛 나는 핑크색이든, 물 빠진 노란색이든 깨끗하게 쓸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없다. 공짜인 게 중요하다. 이 수건이 다 떨어지면 더 예쁜 수건이 나오려나 생각한 적도 있지만 알록달록 기념품 타월은 화수분 같은 벽장 속에 늘 수북이 쌓여 있었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면서 처음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을 때 해마에서 전두엽으로 넘어가 장기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던 타월에 대한 로망이 소환되었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공짜로 얻은 타월이 아니라 내 취향의 타월을 욕실에 걸어 두고 쓸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돌다리 두드리다 시간 다 보내는 성격인 나는, 별 것도 아닌 타월을 선택하면서도 몹시 신중했다. 타월을 고르는 행위 자체가 낯설고 생소해서 마치 새롭게 도전해야 할 과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첫 타월은 아무 무늬도 없는 올 화이트였다. 취향을 반영했다기보다는 글씨만 없어도 그게 어디야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느덧 내 살림을 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 사이 가끔 기념품 타월 선물을 받았지만 글씨가 새겨진 것은 여전히 보관만 하다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있다. 처음 샀던 올 화이트 타월이 걸레로 변신할 때쯤 두 번째로 구매한 우리 집 타월은 화이트 바탕에 네이비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100% 뱀부 타월이었다. 뱀부?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른 사람은 모르는 소재다. (뭐 이런 당연한 말을...) 여기에서 또 뱀부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처음 뱀부 소재를 알게 된 것은 회사에서 행사용으로 지급받은 단체복 티셔츠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지급하는 단체복의 경우 아무리 품질을 좋게 만든다 해도 예산이 제한되어 있으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급받은 임직원들도 일단 회사 로고가 새겨져 있으면 외출복 용도에서는 제쳐둔다. 소파에서 뒹굴거릴 때 입거나 기껏해야 집 앞 편의점 나갈 때 입는 정도가 최선이다.


그런데, 그때 받았던 단체복은 내게 특별했다. 피부에 닿는 촉감이 너무 좋아서 집 밖에서든 안에서든 수시로 애용했다. 물이 빠져 컬러가 흐릿해지고 소매부리가 거의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입었다. 계절이 바뀌어 옷 정리를 할 때마다 이젠 그만 놔줘야지 않하면서도 대체할 옷이 마땅하지 않았다. 대체할 옷을 찾기 위해 꾸깃꾸깃해진 케어라벨을 찾아봤다. 면인 줄 알고 있었는데 뱀부다. 대나무로 옷감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지금 쓰고 있는 우리 집 타월은 대부분 뱀부 소재다. 피부에 닿는 감촉도 좋지만, 머리를 감은 다음 젖은 머리를 감쌀 때, 끄트머리 매듭이 힘 있게 조여지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뱀부 타월의 장점 중 하나다. 머리를 타올로 감싼 상태에서 거울을 보며 스킨을 두드리고 양치를 하는 사소한 루틴은 물 흐르듯 거침없이 진행되어야 기분이 상쾌하다. 그 와중에 타월의 매듭이 힘없이 풀려서 다시 묶어야 할 일이 생기면 미간이 찌푸려진 상태에서 욕실을 나오게 된다.

처음 샀던 뱀부 타월



작년 이맘때쯤, 뱀부를 넘어서는 새로운 소재의 타월을 만났다. 수빈면(Suvin Cotton) 타월이다. 최고급 타월 소재여서 주로 호텔에 납품된다는 수피마면(Supima Cotton)과 유사한 소재지만 수피마면보다 수빈면의 희소성이 더 높다고 한다. 모 쇼핑몰에서 사전 예약구매를 한다고 해서 바로 신청을 했고 몇 달 기다린 끝에 받을 수 있었다.


처음 만져 보았을 때는 보통 수건과 크게 차이를 못 느꼈다. 그런데 세탁하고 건조한 다음 빨래 정리를 하면서 그 감촉에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타월을 위한 나의 최대 찬사는 '고슬고슬'이었는데 수빈면 타월은 고슬고슬을 넘어 '바삭바삭'했다. 대를 이어 가업을 물려받은 장인의 솜씨로 갓 튀겨낸 일본식 텐뿌라가 생각났다.

사용 중인 수빈면 타월. 욕실을 화랑으로 변신시켜 준다.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주는 샤워가 가끔은 귀찮을 때도 있다. 자동으로 머리를 감겨주고 몸도 씻어주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할 때도 많다. 그런데 샤워 부스 밖에서 마음에 드는 타월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라. 샤워는 그저 타월에게 내 몸을 맡길 때 느끼는 상쾌함을 극대화하기 위한 잠깐의 시련일 뿐이다. 샤워를 하는 동안 유리문 밖에 걸린 수빈면 타월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말을 걸 때도 많다.


조금만 기다려!(비누칠하기)
내가 곧 간다(헹구기)!
거의 다 끝나가!(스퀴저로 욕실 물기 제거하기)


샤워를 마치고 욕실 문을 열 때, 글씨가 큼지막하게 박힌 기념품 타월이 걸려 있으면 타인의 선택이 내 욕실을 점령해 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선택하지 않은 물건으로 채워진 삶의 기억은 저 멀리 날려 버리고, 이제는 작더라도 ‘내가 고른 물건’이 내 공간을 차지해 주었으면 한다. 기념품 타월은 무료지만 대신 내 취향을 가져간다. 내 돈으로 산 내 취향의 타월을 욕실에 걸어두는 일은 작은 독립선언과 같은 뿌듯함을 준다.


가난한 프리랜서에게는 사소한 물건 하나가 삶의 품격을 세우는 기준이 된다. 타월 하나의 선택도 중요한 취향의 방어선이다. 남들이 쉽게 선택하는 것을 잠시 거부하고, 조금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내 기준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어쩌면 그 작은 욕망이, 글씨 없는 수건을 로망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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