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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Jan 24. 2017

어떻게 지내?

삶을 채우는 기준

누군가 만나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의 가치 기준이 드러난다. 오랜만에 만날수록 더 눈에 띈다. 많이 쓰는 단어, 흥미를 보이는 소재에 던지는 눈 빛, 톤이 오르며 쏟는 내용 등이 그 사람을 보여준다. 대충 버무려보면 그 사람은 요즘 무엇으로 삶을 채우는지 보인다.


가격표 붙이는 사람


지인의 장례식이었다. 추운 날 발인이니 힘들겠다는 얘기는 곧 요즘 화장터 잡기가 어렵다로 이어졌다. 그때 누군가 지역 화장터는 거의 독점이라며 '사업'이라 얘기했다. 택시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그는 내게 무려 3가지 이상 사업을 더 얘기를 했다. 냥이들을 키우니 그쪽 관련 사업은 어떠냐, 여행 글 쓰면 거기에 광고가 붙느냐, 여행 가서도 일 해보라 등등.

맙소사!!! 그는 내 모든 생활에 돈을 붙이고 있었다.

그가 속물이냐고? 아닐 거다. 최고의 대학에서 학생운동 선봉에 섰다. 졸업 후 대기업 구성원으로 착실히 일했다. 이제 주어진 몫 돈으로 자산을 늘리기로 한 듯하다. 나열하면 앞뒤가 안 맞아서 갸우뚱하다. 무엇이 저 사람의 인생을 관통하고 있을까? 추측 건데 ‘주어진 것을 열심히 하기’ 아닐까 싶다. 아마도 지금은 돈인가 보다.

난 부모세대와 다르게 살 거야. 정말?

그는 체제에 적합한 인간일 거다.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멈춰 선 나 같은 인간은 이 시대에 불편한 존재다. 멈추거나 다른 방향으로 튀면 체제 유지에는 곤란하다. 더군다나 체제가 가치 있다는 걸 계속 생산해야지 '쓸모없는 것'들로 시간을 채우다니. 약지 못하게 가진 것을 늘리기는커녕 까먹고 있는 사람. 그가 계속 사업을 내놓는 건 어리숙한 지인을 도우려는 걸 지도. 그런 점에서 그도 내 부모 세대와 같다.

성인이 되면서 입에 달고 다닌다. 부모와는 다르게 살리라. 우린 과연 달리 살고 있나? 부모는 공동체와 이념의 시대에 살았고 우린 개인화된 자본의 시대에 산다. 그때는 없었던 '내'가 중요해지고 '돈'이 좀 더 중요해졌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쓸모 있기’와 ‘남들처럼’은 불변이다. 모두가 한 방향을 봐야 직성이 풀리고 다수가 인정해야 안심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직에 충실한 것이 부모 세대라면 내 세대는 돈에 충실하다. 아직도 이 범위를 벗어난 변주는 철없고 불편하다.


돈, 제대로 계산해봤니?

돈이 필요한 시대 맞다. 넘친다고 행복하진 않지만 없으면 불편하다. 그런데 진지하게 계산해봤나? 숨만 쉬어도 나가는 거, 포기 못하는 거, 안 써도 되는 거 등등. '얼마나 필요해?'라는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피상적이다. ‘한 10억? 아니다 이자가 낮으니 50억? 에라 많으면 좋지 100억?’ 내 시간의 대부분을 걸면서 너무 안이하다. 사실 저 질문에는 '넌 어떻게 살 거야?' 혹은 '너 뭘 하며 살고 싶어?'가 숨어있다. 이런 질문 안 해봤다면 대답도 뭉뚝한 게 당연하다.

돈 벌기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도 늘어난다. ‘애들 사교육비가. 차도 바꾸고 집도 바꿔야. 럭셔리하게 여행 가려면. 남들 다하는데 나도 해야.’ 그 소비를 움켜쥐려면 계속 벌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소비를 위해 돈벌이에 매진할 건지 덜 쓰고 다른 걸 남길 건지는 선택이다. 좋고 나쁘고는 없다.

막연히 몫 돈을 기대한다면 운에 맡기는 거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돈은 더하다. 노력이나 실력에 별 반응 안 한다. 큰 몫 앞에 선 이들의 흔한 착각은 ‘이건 내 실력이야’라는 거다. 흥했다 더 크게 망하는 걸 종종 볼 수 있는 이유다.

이게 좋고 저게 나쁘다는 거 아니다. 돈이 가치 기준이고 목적이면 그만큼 알고 대하시라는 거다. 그거 아니면 수단이니 잘 계산해보라는 거다. 무작정 쌓기만 하거나 막연히 충분치 못하니 매여 다니기에는 그 돈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 그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선택이 의미 있지 않겠나.


난 하고 싶은 것이 없어


사실 돈돈돈 하지만 그 돈 생겨도 하고픈 것이 없는 사람도 있다. 꽤 있다. 그래서 하던 대로 산다. 관성처럼. 설마 돈이 해결됐는데 하고픈 것이 없다니? 그럴 수 있다. 해 본 것이 있어야 하고픈 것도 생긴다. 시키거나 주어진 거 말고 내가 스스로 시도해 본 것이 없었다면 시작이 가장 어렵다. 막연히 '하면 좋지 않을까'와 막상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어느 날 불현듯 '이거다'는 기분이지 현실은 아니다. 그럼 시도하며 어슬렁거릴 시간이 필요하겠지? 근데 이거 당신 자신이나 자식에게 용납하나? 그건 우리가 ‘쓸모없다'라고 낙인찍은 시간이다. 선택과 결정 뒤에 이런 질문 습관적으로 하지 않나 물어보라. ‘그걸 어디에 쓰냐? 그걸로 먹고살 수 있어?’

더군다나 무슨 강박처럼 하고픈 걸 직업으로 가져야 한단다. 한국에선 전공을 10대에 정한다. 부모도 선생도 그 전공을 평생 업이라 단정 짓는다. 변할 수 있으니 여유를 가지고 찾으라는 어른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처음 선택이 마침 적성에도 맞고 기특하게도 잘하며 하고픈 일이기도 하다니. 그리 운 좋은 인생이 얼마나 되나? 당장 생업과 하고 싶은 일은 달라도 된다. 하고프면 어떻게든 계속할 방법을 찾는다. 아니라면 핑계를 찾겠지. 뭔가를 자꾸 미루는 건 하기 싫은 거다. 시간이 없는 거 아니고.


시간이 소중해지면...


목 디스크로 몇 달을 누워만 있었다. 자다 고통으로 깨기를 반복했다. 잔고가 아무 의미가 없더라. 누워만 있는데 그걸로 뭘 하겠느냐 말이다. 아픈 건 괴롭지만 관점이 변할 계기가 된다. 여행과 비슷하다. 낯선 곳의 불편함과 그것을 해석하는 후작업.

누워만 있으면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사는 걸까? 그 순간 노년을 걱정하던 내 모습이 우스워졌다. 노년에는 분명 더 안 좋을 거다. 고민할 필요가 없던 거였다. 삶의 한 가지 기준점이 정해졌다. 적어도 이 정도면 삶을 지속할만하다는 나만의 필요조건이 정리된 거다.

그럼 그때까지는? 내게 의미 있는 걸로 시간을 채워야지. 가장 소중한 건 시간이니. 뭘 해도 좋을 내 시간. 그러니 내 시간에 돈을 붙이는 사람을 보면 난감하다. 사실 시간은 내 기준이지 그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치를 매기는 거다.


오랜만에 만난 이에겐 속으로 묻곤 한다. 당신에게 소중한 건 무엇인지? 그걸로 삶을 채우며 사는지? 그리고 보고 들으며 답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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