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장|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열꽃

아직 식지 않은 마음의 온도

by Helia

끝났다고 믿었던 마음이 있다. 이미 식어버렸다고, 손을 대도 아무 온기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감정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 예고 없이 그 마음에 스치듯 손이 닿는 순간이 있다. 그때 나는 알게 된다. 아직 따뜻하다는 걸. 아주 미미해서 알아채기 어려웠을 뿐, 완전히 꺼진 적은 없었다는 걸. 그 온도는 불현듯 나를 붙잡고, 지나간 시간 위로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
처음엔 그것이 열꽃인지 몰랐다. 뜨거움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그 시작은 언제나 희미했다. 누군가의 말투, 오래된 기억의 냄새, 무심히 스친 장면 하나가 씨앗이 되어 마음속 어딘가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숨이 조금 가빠진다. 이유 없는 불안이나 쓸쓸함으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안쪽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열 때문이다. 소리 없이 번지고, 빛도 작아서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불꽃. 그것이 열꽃이다.

열꽃은 요란하게 피지 않는다. 박수를 요구하지도, 주목을 끌지도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떨림으로 마음을 흔든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수없이 지나쳤다. 대수롭지 않은 감정이라며 외면했고, 괜한 기대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하지만 마음은 생각보다 집요하다. 외면한 감정일수록 더 깊이 남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 다시 고개를 든다. 그러다 결국 나는 알아차린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순간들 사이사이에, 이미 열꽃은 피어 있었다는 걸.

그 열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데일 수 있고, 외면하면 속에서 더 뜨거워진다. 그래서 나는 늘 애매한 거리를 택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고, 그리움을 무심한 척 덮어두었다. 들키지 않기 위해 차가운 표정을 연습했고, 아무렇지 않다는 말로 스스로를 속였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열은 결국 틈을 찾는다. 말하지 못한 문장 사이로, 외면한 기억의 틈새로 스며들어 나를 태운다.

어떤 열꽃은 금세 사라진다. 잠깐 피었다가 흔적 없이 식어버린다. 반면 어떤 열꽃은 오래 남는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흘러도 잔열처럼 가슴에 남아, 문득문득 나를 놀라게 한다. 이미 끝났다고 정리한 관계, 더는 떠올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얼굴이 갑자기 선명해질 때, 나는 그 온도 앞에서 멈칫한다. 분명 다 식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따뜻하다. 그 온도는 때로는 아픔이 되고, 때로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

열꽃은 나를 머물게도 하지만, 앞으로 밀어내기도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날들 속에서, 괜히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게 만든다. 쓰지 않아도 될 문장을 끝내 쓰게 하고, 만나지 않아도 될 이름을 마음속에서 다시 불러낸다. 이성은 늘 경고한다. 괜히 다치지 말라고, 이미 한 번 겪은 온도라고. 하지만 열꽃은 그런 충고를 가볍게 지나친다. 삶은 원래 안전한 쪽이 아니라 뜨거운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아무것도 타오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속삭이면서.

나는 많은 열꽃을 지나왔다. 피어나기도 전에 스스로 꺼버린 것들도 있고, 끝까지 타오르다 재만 남긴 것들도 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모든 열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 어떤 불꽃은 상처를 남기지만 어떤 불꽃은 길을 비춘다는 것. 무엇보다 열꽃은 억지로 피울 수 없고, 억지로 꺼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만 올 때 오고, 갈 때 가며, 그저 나를 통과해 갈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르게 대하려 한다. 열꽃이 피어오를 때, 무조건 외면하지도, 무작정 달려들지도 않으려고 한다. 대신 잠시 멈춰 서서 그 온도를 느낀다. 이 열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얼마나 오래 머물지, 끝내 나를 태울지 아니면 은근히 데워줄지. 판단을 서두르지 않고, 감정이 흘러가는 방향을 지켜본다. 그렇게 하면 마음은 이전보다 덜 다치고, 후회도 조금 줄어든다.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열꽃은 삶의 증거다. 아직 무엇인가에 반응하고, 흔들리고,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신호다. 완전히 식어버린 마음에서는 어떤 꽃도 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미약한 열을 부정하지 않으려 한다. 설령 그 끝이 아픔일지라도, 그 과정이 불안과 망설임으로 가득할지라도, 한 번쯤은 뜨거워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오늘도 마음 어딘가에서 작은 열꽃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다. 아직은 희미해서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나는 더 이상 서두르지 않는다. 꺼뜨리려 애쓰지도, 억지로 키우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숨을 고르며 바라본다. 이 아스라한 불빛이 나를 조금 더 살아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