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장|너는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어

보이지 않는 쪽에 남겨진 마음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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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너는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어. 그 말은 너무 담담해서, 나는 그 속에 숨은 파도를 한참 뒤에야 알아챘다. 바다는 늘 거기 있는 풍경인데, 왜 하필 그 순간에 바다였을까. 네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 한마디는 소망처럼 가벼웠지만, 내 귀에는 오래 눅눅한 잔향으로 남았다. 바다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었다. 네가 잠시 빠져들고 싶은 깊이였고, 지금의 자리에서 멀어지고 싶은 방향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네가 보고 싶은 것이 정말 물과 수평 선 뿐일지, 아니면 이곳에 남아 있는 무엇을 잠시 지워버리고 싶은 건 아닐지 혼자서만 생각했다. 너는 바다가 사무친 마음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지. 그 말이 유난히 조용해서, 나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위로를 건네기엔 네 마음의 방향이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고, 붙잡기엔 내가 너무 가까이 서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늘 너를 보고 있었는데, 너는 그 사실을 굳이 확인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네 시선은 이미 바다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나는 그 곁에서 파도보다 작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나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보지 않아도 괜찮아 보인다는 점이 더 씁쓸했다.

바다는 언제나 많은 것을 대신해 준다.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 꺼내면 무너질 것 같은 생각들, 누군가 앞에서는 끝내 삼켜야 했던 마음까지도.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를 핑계 삼아 떠난다. 여행이라는 말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잠시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지기 위해서. 너도 그랬을 것이다. 나를 외면하려는 마음이라기보다, 지금의 네가 너무 벅차서 숨 쉴 틈을 찾고 있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와 별개로, 마음은 늘 먼저 다친다. 이해는 나중에 따라오는 설명일 뿐이다.

나는 네 곁에 있으면서도, 점점 투명해지는 기분을 자주 느꼈다. 네가 바다를 말할 때마다, 나는 한 걸음씩 뒤로 밀려났다. 네가 보고 싶은 풍경이 선명해질수록, 나는 배경처럼 흐릿해졌다. 그렇다고 네 앞에서 서운함을 꺼낼 수는 없었다. 바다가 보고 싶다는 말은 너무 무해해서, 그 안에 숨은 거리감을 탓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말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그리움처럼 들렸고, 나는 그 그리움 앞에서 괜히 예민한 사람이 되기 싫었다.

바다는 늘 같은 얼굴이 아니다. 햇빛을 받을 때는 눈부시게 반짝이고, 흐린 날에는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 상태에 맞는 바다를 떠올린다. 너는 어떤 바다를 보고 싶었을까. 파도가 거칠게 부서지는 해안이었을까,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잔잔한 수면이었을까. 나는 아마 네가 조용한 바다를 떠올렸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 말도 요구하지 않는 곳. 곁에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풍경. 그 점에서 나는 바다가 아니었다.

나는 네가 바다를 말할 때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내가 너무 가까이 있었던 건 아닐까, 혹은 너무 많은 눈길을 요구했던 건 아닐까. 그러나 그런 질문 끝에는 늘 같은 답이 남았다. 나는 그저 네 곁에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 눈을 떼지 않았고, 마음을 접지 않았고, 늘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 그래서 더 씁쓸했다. 멀어진 이유가 다툼도, 상처도 아니라는 점이. 그저 네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허탈했다.

바다는 사람을 비워준다. 바람은 생각을 흩뜨리고, 파도는 마음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깎아낸다. 그래서 바다 앞에 서면, 사람은 잠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너는 아마 그 아무것도 아닌 상태를 원했을 것이다. 책임도, 관계도, 기대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의 바깥에 서 있었다. 너의 비워짐에 포함되지 못한 채, 남겨진 쪽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너는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오래 기억하게 됐다. 그 문장은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의 이름 같았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지는 신호. 나는 그 신호를 모른 척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붙잡지도 못했다. 바다는 잡을 수 없는 풍경이고, 그 풍경을 향한 마음 역시 손에 쥘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그 자리에 남아, 네가 돌아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시간을 견뎠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바다는 너의 도피가 아니라 솔직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서 멀어지고 싶다는 말을 바다로 바꿔 말했을 뿐. 혹은 나와 함께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어떤 부분을, 네 방식으로 설명한 것이었을 뿐. 그렇다 해도, 마음이 다치지 않는 건 아니다. 이해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감정은 늘 제 속도로 아문다.

맞아, 너는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어. 그 말은 아직도 내 안에서 잔잔히 반복된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빠져나가며 흔적을 남긴다. 바다는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고, 너도 언젠가 그 앞에 서겠지. 다만 그 바다를 향한 너의 시선 속에, 내가 아주 잠시라도 스쳐 지나갔으면 좋겠다. 완전히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지 않기를, 그 정도의 바람만은 아직 남아 있다. 바다는 많은 것을 잠재우지만, 모든 그리움을 지워주지는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