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기 전에, 한 발만
시작도 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돌아설 준비를 마친 얼굴로 앉아 있다. 발을 떼기도 전에 낙오를 가정하고,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패배를 상상한다. 될지 안 될지는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인데, 우리는 왜 늘 안 될 쪽부터 챙겨 쥐고 있을까. 아직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으면서, 이미 모든 가능성을 소진한 사람처럼 고개를 떨군다. 그 편이 덜 아플 것 같아서, 덜 부끄러울 것 같아서. 실패 대신 ‘애초에 안 했음’이라는 얇은 보호막을 두르면 마음이 조금은 안전해질 것 같아서.
하지만 그 보호막은 생각보다 허술하다. 시작하지 않은 일들은 조용히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루의 끝에서, 불을 끄고 누운 방 안에서, 그 일들은 그림자처럼 다시 나타난다. 그때 왜 안 했을까, 그때 한 번만 해봤다면 어땠을까. 실패는 시간이 지나면 흉터가 되지만, 시작하지 않은 일은 질문으로 남는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오래도록 마음을 긁는다.
우리는 포기를 종종 성숙함으로 포장한다. 안 될 걸 아는 건 현명한 선택이라고, 괜히 다치지 않는 게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말한다. 물론 내려놓아야 할 순간도 있다. 모든 길을 끝까지 붙잡고 가야만 옳은 건 아니다. 다만 문제는 포기할 자격조차 얻기 전에 이미 등을 돌려버릴 때다. 시작해보지도 않은 포기는 선택이 아니라 회피에 가깝다. 도망칠 때 도망가더라도,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최소한 한 번은 발을 디뎌봐야 한다. 그래야 돌아서는 방향에도 이유가 생긴다.
시작은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박수와 응원이 깔린 출발선도, 완벽하게 준비된 첫날도 없다. 시작은 늘 어설프고, 조금은 초라하다. 머릿속에만 있던 생각을 삐뚤어진 문장으로 적어보는 일, 망설이다가도 문 손잡이를 한 번 눌러보는 일, 목이 잠긴 채로라도 하고 싶은 말을 소리 내어 말해보는 일. 그 정도면 충분하다. 시작은 늘 부족한 얼굴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시작을 미룬다. 조금만 더 준비하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다음 계절이 오면 용기가 생길 것 같아서.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작은 준비가 끝난 뒤에 오지 않는다. 시작은 늘 준비가 덜 된 순간에, 마음이 흔들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때 생긴다.
도망치고 싶어지는 마음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두렵다. 잘못될까 봐, 웃음거리가 될까 봐, 스스로에게 실망할까 봐 겁이 난다. 문제는 그 두려움이 앞에 서서 방향을 결정할 때다. 두려움이 운전대를 잡으면 우리는 늘 뒤로 간다. 그러나 두려움을 조수석에 앉히고 한 발만 앞으로 나가면, 풍경은 조금 달라진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지만, 전부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유난히 지친 날이 있다. 몸은 가만히 있었는데 마음이 먼저 닳아버린 하루. 그런 날을 가만히 되짚어보면, 대개 수없이 많은 시작을 마음속에서 접어버린 날이다. 하지 않은 말들, 미뤄둔 선택들, 삼켜버린 용기들이 서로 부딪히며 피로를 만든다. 반대로 서툴게라도 시작한 날은 결과와 상관없이 묘하게 덜 후회가 남는다. 실패했어도 ‘해봤다’는 사실 하나가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한다.
시작은 결과를 약속하지 않는다. 끝까지 가지 못할 수도 있고, 중간에 방향을 바꾸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시작이 헛된 건 아니다. 시작은 결과 이전에 태도를 바꾼다. 나는 늘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한 번은 해보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그 작은 변화는 생각보다 오래간다. 한 번 시작해 본 사람은, 다음번 시작 앞에서 조금 덜 겁을 낸다. 발밑이 완전히 보이지 않아도, 일단 한 걸음 내디뎠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도 이 글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번에도 안 될 거야, 나랑은 안 맞아, 괜히 시작했다가 더 상처받을 거야. 그 말들을 억지로 지울 필요는 없다. 다만 한 가지만 물어보면 된다. 정말로 시작도 하기 전에 모든 결론을 내려도 괜찮을까. 아무것도 해보지 않은 채로 확신해도 되는 걸까.
포기할 때 포기하더라도, 도망갈 땐 도망가더라도, 시작은 해봐야 한다. 시작하지 않은 도망은 늘 미련을 남기지만, 시작해 본 뒤의 포기는 적어도 스스로를 이해하게 만든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그래서 오늘도 마음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려 할 때, 아주 작은 시작 하나만 허락해 보자.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오래가지 않아도 괜찮다. 시작했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
시작은 특별한 사람의 특권이 아니다. 용감한 사람만이 쥐는 배지도 아니다. 시작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품은 채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움직여본 사람에게 남는 흔적이다. 그 흔적이 쌓이면, 우리는 언젠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늘 도망만 치던 사람은 아니었다고. 적어도 시작 앞에서는, 몇 번쯤은 멈추지 않았다고. 그리고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다음 시작은 조금 덜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