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이 머문 자리
추천 클래식 Claude Debussy – “Rêverie (몽상)
여름이었다.
몇 년도였는지, 며칠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름이었단 건 확실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고,
햇빛은 조금도 주춤거리지 않았으며,
카메라 셔터 소리조차 공기 속에 금세 묻혀버릴 만큼 무기력했다.
친구와 나는 즉흥적으로 카메라를 챙겨
경춘선을 타고 가평 상천역 근처로 향했다.
계획도 없었고, 목적지도 대충이었다.
그냥 어디든 좋아 보이는 곳에서 내려,
하루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사진이나 찍고 오자,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
상천역에서 내려 조금만 걷다 보면,
사람의 발길이 뜸한 호숫가 산책길이 하나 나타난다.
물결이 낮고 조용했고,
바람은 희미했으며,
가로등은 낮인데도 묘하게 길쭉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그날 찍은 수많은 사진들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한 장을
바로 그곳에서 찍었다.
친구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삼각대도 없이 카메라를 들고 하늘을 찍고 있었다.
빛은 맑았고,
구름은 가볍게 흩어졌으며,
햇살은 호수 위로 길게 내려앉아 있었다.
풍경은 딱히 특별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 순간은 사진 한 장이 아니라 '기억 한 장'을 찍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기척이 있었다.
느낌도 있었다.
소리도 없이 내 옆에 다가온 한 남자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뭐 찍고 있어요?”
나는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하늘이요.”
그는 내 옆에 바짝 붙지 않았고,
적당히 거리를 둔 채
햇살을 등지고 서 있었다.
목소리는 나긋했고, 눈빛은 단정했다.
무례하지도, 지나치게 친근하지도 않았다.
그냥 어딘가 무심한 말투 속에 오래된 정중함 같은 게 느껴졌다.
“여기 참 좋네요. 사진 찍기.”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러네요.”라고 대답하며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냥 그날의 공기처럼, 흐르고 지나갈 말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말을 꺼냈다.
“혹시, 저 좀 찍어주실 수 있어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낯선 사람이 인물 사진을 부탁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평소에도 인물을 잘 찍지 않았다.
뭐랄까, 사람의 얼굴을 찍는 일이란 건
풍경보다 훨씬 더 섬세한 공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늘 부담스러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풍경만 찍어요. 인물은 잘 못 찍어요. 자신이 없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냥 오랜만에 누가 좀 찍어줬으면 해서요.”
이상했다.
싫지도 않았고, 무섭지도 않았고,
거부감도 없었지만
어딘가 알 수 없는 이질감이 피어오르던 순간.
나는 결국 카메라를 들어
그를 프레임 안에 담았다.
셔터를 몇 번 눌렀고,
사진을 확인해 보니
그는 그 안에 있었다.
호수와 하늘, 그리고 그 남자의 모습이 분명히 잡혀 있었다.
그 역시 고개를 기울여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살짝 웃었고,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이 그 말을 대신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순간,
멀리서 친구가 나를 불렀다.
“야! 얼른 와봐!”
나는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돌렸는데—
그는 없었다.
그렇게 갑자기,
말도 없이,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 넓은 길 위에 그 사람은 없었다.
물가도, 길목도, 아무 데도.
그 순간
친구가 다가오며
웃으며 말했다.
“너 혼자서 뭐 그렇게 혼잣말을 해?”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다시 들고
방금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호수와 하늘,
빛과 그림자,
구도와 노출,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그 남자만 없었다.
분명히 함께 화면을 들여다보았는데.
분명히 내 손으로 셔터를 눌렀는데.
그가 서 있던 자리는
마치 원래부터 비어 있던 공간처럼
너무나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나는 사진을 지웠다.
지우는 데 주저함은 없었다.
기억이 아닌, 기분이 찜찜했다.
그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게
어딘가 나를 따라올 것 같은 감각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길,
기차 안에서야
문득 하나가 떠올랐다.
그 사람의 입술 색이었다.
보랏빛.
햇빛이 강한 한낮이었는데도,
그의 입술은 이상하게 색이 없었고,
살짝 푸르고,
마치 체온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서늘하고 멍든 빛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색 하나가
그날의 전부를 말해주고 있었다는 걸.
그날 이후,
나는 풍경을 찍을 때
사람이 있던 자리를 한 번 더 확인하게 되었다.
그림자가 맞는지,
빛의 방향이 자연스러운지,
혹시라도 카메라가 기억하지 못한 ‘무언가’가
그 안에 있지는 않은지.
사라진 사람의 사진은 없지만,
그 여름의 기억은 또렷하다.
상천역 근처,
그 호숫가 길,
가로등 옆.
누군가 분명히 존재했던 자리.
지금도 나는 안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기억은 때때로
사라진 진실을 더 정확히 담아낸다.
그날의 입술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보랏빛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