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짐과 살아냄 사이
추천 클래식
Arvo Pärt의 'Spiegel im Spiegel'
누구나 들어봤을 거다. “시간이 약이야.” 흔하고 익숙한 위로. 하지만 나는 그 흔한 말을 끝내 믿지 못했다. 어떻게 시간이 약이 될 수 있지? 무뎌지는 것뿐, 상처가 아물어지는 건 아니잖아. 괜찮은 척하는 거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으니까. 이건 내 삶을 통틀어 반복해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참 쉽게 말한다. 마치 그 말 한마디면 모든 고통이 저절로 사라지기라도 하듯. 하지만 상처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은 바래지만,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도 선명하게 남아 나를 덮칠 때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음악 한 소절, 거리의 풍경 하나, 낯선 향기 하나가 묵혀둔 고통을 되살린다. 그럴 때마다 깨닫는다. 시간은 약이 아니라고.
나는 수없이 들어왔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했을 때도, 관계가 무너졌을 때도, 큰 실패 앞에 무너졌을 때도. 사람들은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그 괜찮음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정말로 아픔이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더 이상 드러내지 못하게 되는 걸까. 내가 경험한 건 후자였다. 아픔은 여전히 내 안에 있었지만,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괜찮은 척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무뎌진다는 건 낫는 게 아니다. 감각이 닳아 없어지는 것뿐이다. 처음엔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 고통은 조금 흐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마치 깊숙이 박힌 가시처럼, 건드리지 않으면 괜찮은 듯 살지만, 불현듯 스치면 여전히 따갑고 쓰렸다. 이게 어떻게 약일 수 있을까.
사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상처 입은 사람보다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이 더 필요로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아픔 앞에 오래 머무르는 일은 어렵다. 고통은 무겁고,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것은 상대방을 위로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는 말이다. 정작 상처 입은 사람은 그 말에 더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아, 이 사람도 끝까지 함께해주진 못하는구나. 그 순간 더 고립된다.
나는 그래서 다르게 말하고 싶다.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아.” 상처는 흔적을 남기고,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불행을 뜻하는 건 아니다. 흉터는 내가 살아냈다는 증거다. 고통을 지나왔다는 기록이다. 아픔은 사라지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이 나를 버티게 한다.
시간이 가진 힘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시간은 모든 것을 퇴색시킨다. 사진이 햇볕에 바래듯, 기억도 조금씩 빛을 잃는다. 날카로운 감정은 옅어지고, 선명했던 순간은 흐려진다. 하지만 그것은 치유가 아니다. 단지 희미해짐일 뿐이다. 사라진 게 아니라 바래진 것이다. 그 희미함 속에서 우리는 조금은 숨을 고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약이 될 수 없다.
진짜 약은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글을 썼고, 사진을 찍었고, 때로는 끝없이 걸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흘려보냈다면,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멈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붙잡았기에 나는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결국 상처를 치유하는 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채워내는 나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시간은 재료일 뿐이다.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 시간을 예술로 바꾸고, 누군가는 새로운 만남으로 채운다. 누군가는 도전의 힘으로 삼는다.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고통에 잠식되면, 시간은 독이 된다. 결국 결정권은 시간에게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다.
나는 여전히 상처를 품고 살아간다. 때로는 그것이 나를 짓누르지만, 동시에 나를 단단하게 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믿지 않는다. 다만 시간을 살아내는 동안 내가 달라졌다는 건 믿는다. 결국 약은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견뎌낸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앞으로도 상처는 계속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나는 이미 배웠으니까. 상처가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괜찮은 척하는 순간조차 나를 살려낸다는 것. 그리고 나는 또다시 오늘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은 약이 아니었다. 다만 나는 그 시간을 견디며, 나 자신을 약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믿지 않는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 다만 오늘을 살아내는 내가 약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