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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죽음이 삶을 흔들 때, 남는 것은 인간의 온기였다

by Helia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화면 속 인물들이 뿜어내는 생의 냄새가 거의 손끝에 닿을 듯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단지 병에 맞서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스크린 밖으로 새어 나오는 숨, 땀, 절망, 욕망, 그리고 마지막까지 버티려는 생명력 자체가 한 편의 장대한 기록처럼 흐른다. 러닝타임이 길지 않은데도 유난히 오래 머문 이유는 단순한 감정 소비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감각을 마주하게 만드는 어떤 날것의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로드 트럭을 몰고 달리던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라는 낙인을 받는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폭우처럼, 의사들의 진단은 그의 삶을 단숨에 망가뜨린다. 그 순간부터 로든 우드는 세상의 뒷골목으로 떨어진다. 그립게도 한때는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처럼 여겼을 그가, 단숨에 변두리의 이름 없는 환자로 전락한다. 이 영화가 나에게 가장 먼저 던졌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목숨이 시한부라는 사실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는 이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무너지는 장면보다 더 집요하게 비춘 것은, 버티려는 의지가 생겨나는 과정이었다. ‘끝이 보인다’는 선언이 한 사람을 절망시키는 동시에, 기어이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영화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말한다. 로든은 약을 구하기 위해 멕시코와 미국 국경을 넘고, 의사도 아닌 채로 환자들에게 약을 나눠준다. 불법과 합법, 도덕과 생존, 그 모호한 경계 위를 맨발로 걷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 무모한 걸음의 밑바닥에는 ‘살아보겠다는 욕망’이라는 뜨거운 심장이 뛰고 있었다.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 무모함을 그저 영웅처럼 미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누군가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 움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몸짓은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생명을 건져보려는 발버둥이 누군가에게는 기적이 된다.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누군가의 생존을 위해 주는 손길로 변모하는 것이다. 마치 물이 흘러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샘을 만드는 것처럼, 로든의 움직임은 다층적인 의미를 품게 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레이온이라는 인물은 영화의 결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레이온은 그저 조연이 아니다. 차갑고 건조한 세계에 한 줄기 푸른 조명을 켜는 존재다. 그녀는 스스로가 세상 모든 곳으로부터 밀려난 사람처럼 보이지만, 로든 앞에서는 예외적으로 다정하고, 놀라울 정도로 성숙한 인간적인 온기를 내뿜는다. 이 둘의 관계는 친구도, 가족도, 동지도 아닌, 그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결로 엮여 있다. 어떤 장면들은 마치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이 버린 사람들끼리, 세상을 버티기 위해 서로의 체온에 기대는 모습은 잔잔하면서도 눈물겹다.

영화는 에이즈라는 병을 다루면서도, 그 질병을 ‘낙인’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병은 배경이고 맥락이며, 인간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창일뿐이다.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병에 걸린 남자”가 아니라 **“병을 통해 자신을 다시 발견한 사람”**이다. 로든은 병을 통해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예고장이 그를 살게 만들었다. 죽음을 통지받은 사람일수록 더 격렬하게 생을 움켜쥐는 기이한 역설. 그 역설이 로든이라는 캐릭터를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개인적으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 가진 힘은 영화적 구성이나 드라마틱한 사건보다, 그 ‘허기진 숨결’에 있다고 느꼈다. 화면이 자꾸 바스러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거친 촬영, 배경음보다 크게 들리는 인물들의 들숨과 날숨, 그리고 가혹하다 싶을 만큼 덤덤하게 이어지는 서사. 그 모든 것이 이 영화를 ‘꾸밈없는 삶의 기록’처럼 만든다. 마치 오래전, 누군가의 낡은 일기장을 펼쳐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생의 얼룩, 욕망의 모서리, 병든 몸의 한계, 그리고 그 위에 바르는 미약한 희망의 약.

특히 마음에 남은 장면은, 로든이 병상 위에서 홀로 숨을 고르는 순간들이었다. 그 표정엔 두려움과 억울함, 분노와 체념이 한꺼번에 얽혀 있었다. 누군가 지켜보는 앞에서는 결코 털어놓지 않았을 감정들이, 홀로 남겨진 침묵 속에서 고요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결국 자신과 가장 오래 마주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 고독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우리를 흔든다. 다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싸움을 우리는 늘 혼자서 치른다.

영화 속 로든은 악착같이 버티던 사람이지만, 그 버팀의 중심에는 언젠가 끝날 시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분투는 장대한 영웅서사가 아니라, 마치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 손톱으로 바위를 긁어대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 절박함이 관객의 가슴에 뜨겁게 남는다. 살아남으려는 욕망은 때로는 추하고, 때로는 비루하며, 때로는 눈부시기까지 하다. 영화는 그 모든 얼굴을 마다하지 않고 보여준다.

레이온과의 마지막 장면들은 여전히 마음을 붙잡는다. 서로를 구원하려고 하지도, 위로하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지만, 묘하게 서로를 지탱한다. 세상과 너무 멀었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만큼은 조금 천천히, 조금 더 부드럽게 다가가던 순간들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그 장면들은 충격적인 사건보다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문득문득 떠오르는 잔향처럼 머문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에게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은 슬픔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존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결말이 예고되어 있더라도,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어떤 방식으로 살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로든이 선택한 삶은 거칠고 우악스러웠지만, 동시에 눈부시게 인간적이었다. 그는 제 몸 하나 건지기 위해 움직이면서도, 누군가의 생존을 위해 힘을 나누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 마음은 어떤 영웅담보다 강렬했다.

이 영화는 결국 우리에게 묻는다.
“죽음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질문은 새벽 공기처럼 차갑게 스며들면서도 묘하게 따뜻한 울림을 남긴다. 삶을 단번에 바꿔놓는 거창한 질문이 아니라, 한 걸음 더 살아 보고 싶게 만드는 작은 자극 같다. 나 또한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내 호흡 소리를 조금 더 귀 기울여 듣게 되었다. 살아 있음이란 이렇게 단단하면서도 쉽게 금이 가는 유리잔 같아서, 조심스럽고, 아프고, 놀랍고, 사랑스럽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아프고, 지저분하고, 투박하고, 불편한 이야기다. 동시에 누구보다 인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귀하게 포장된 희망보다는, 손에 잡히는 절망과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희망이 얼마나 값진지를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단지 ‘에이즈를 다룬 실화 영화’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 인간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싶었던 생의 잔불에 대한 기록.”

그 잔불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지만, 끝내 꺼지기 전까지는 세상을 미약하게나마 비춘다. 그 미약한 빛에 우리는 자꾸 마음이 흔들리고, 영화는 그 흔들림을 우리에게 오래도록 품게 만든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그런 영화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뜨겁고, 때로는 아린 기쁨으로 다가오는—
그 복잡한 감정의 모자이크를 한 사람의 생애로 보여주는, 묵직한 울림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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