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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여기 Apr 24. 2020

보나라는 세례명으로 태어나던 날

나의 세례 이야기


아주 오래전 5월 29일은 나의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한 날이다. 사회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는 날, 처음으로 직장인이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달던 그날은 그 어떤 처음보다 두렵고 막막했다. 지금까지 날 보호하던 울타리가 한순간 사라지고 끝없는 모래사막에서 홀로 살아남으라는 미션을 받은 것처럼.






나의 전공과는 전혀 다른, 단 한 번도 이 길을 걷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던, 국제선 항공권 판매를 주 업무로 하는 회사였고, 그 당시에도 이미 가파른 성장을 하고 있었다. 20년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나라의 힘든 경제 위기를 버텨냈고 꾸준히 성장했고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냈으며 그만큼 완고한 독불장군이 되어갔다, 회사도 나도.



그런 내 모습과 마주한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고 첫 여행으로 산티아고 길을 걷는 도보여행을 선택했다. 세례를 받기 전인 나에게 그 길은 신앙의 순례가 아닌 도보여행이었고 그 조차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그해 성탄 즈음 가까운 지인의 세례식에 참석하였다가 우연히 묵주 팔찌를 선물 받게 되었다. 나에게는 종교적인 의미는 없었지만 예쁜 팔찌가 맘에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작은 인연은 나를 성당에서 예비자 교리를 받게 하였고, 드디어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 며칠 전쯤 예비자 교리를 지도해 주시던 신부님께서 세례명은 굉장히 중요하다시며, 신중하게 생각해서 세례명을 정하고 그 이유를 준비 해오라는 과제를 내주셨다.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의미 있는 날을 생각하니 5월 29일이었다. 내가 세상에 나온 날은 나 스스로 선택한 날이 아니지만 그날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인생이었으니까. 자료를 찾아보니 그날의 성녀는 보나 성녀였다. 여행자들, 특별히 여행안내자와 비행기 승무원 등의 수호성인이며 산티아고 길을 9번이나 순례하신 분이라는 설명을 본 순간 그동안 나는 알지 못했지만 내 삶은 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선택하고 걸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의 그 감동을 자주 잊고 삶의 중심도 자주 잃고 살고 있지만, 내가 힘들 때면  나를 업고 걸으시고, 잘못된 길을 걸을 때조차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시며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 계심을 알기에 오늘도 '좋은' 나로 살아야겠다. 보나는 좋은(good)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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