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일기 4
그동안 뭔갈 돌아보고 사색해 볼 만한 시간을 가지기 어려웠다. 졸업 후의 진로를 준비해야 하기도 했고, 학교 생활을 하며 하루하루 눈앞에 닥친 것들을 해내기 바빴기 때문이다.
나는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온 것이기 때문에 5월이면 현재 재학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졸업하게 된다. 일단 가보면 뭐라도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조금은 무모하게 시작한 여정도 조금씩 결실을 맺어가는 것이다. 사실 졸업 이후에도 박사과정을 통해 학업을 이어갈 계획이기에 길고 긴 이야기의 서두가 이제 겨우 마무리되어 가는 것뿐이지만 말이다.
박사유학을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겠지만, 원서 접수 이후의 기간은 그저 막연한 기다림 그뿐이다. 내가 합격 가능성이 높은지 결과는 도대체 언제 나올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학교마다 전공마다 달라서 어떤 곳은 인터뷰를 보기도 하고 어떤 곳은 보지 않기도 하고, 그저 오리무중의 상태 속에서 인터뷰 요청이 오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안 오면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다.
Gradcafe라는 사이트가 있다. 주로 미국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사이트인데 합격여부 인터뷰 요청 여부 등을 공유하는 사이트이다. 무의미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Gradcafe를 확인해 보며 내가 지원한 프로그램에 혹시 인터뷰 요청이 돌고 있는지, 합격 여부를 발표하기 시작했는지 등을 확인하게 된다. 더불어 이메일도. 혹시나 스팸메일함에 가있어서 내 메일함이 이렇게 조용한 건지 스팸메일함을 들락거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메일함을 새로고침한다.
합격에는 해당 연도 학과 또는 교수님의 펀딩 상황, 해당 연도 교수님의 학생 모집 여부 등 너무나도 많은 것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수능 점수처럼 모든 걸 정량화해서 합격가능성을 예측하기가 힘들다. 심지어는 특정 교수님이 계셔서 그 학교를 지원했지만 교수님이 해당 학기에 학교를 옮기실 수도 있다. 내 경우가 그랬다. admission committee와 인터뷰를 하는데 입학 후 어떤 교수님과 일하기를 희망하느냐 하는 질문에 ㅇㅇ 교수님과 일하고 싶다고 답하자 해당 교수님은 이번 학기에 다른 학교로 옮기셨다는 답을 들었다. 함께 일하고 싶은 다른 교수님들이 더 계셔서 그분들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분들도 다 이번에 각기 다른 학교로 옮겨가셨다고. 당황스러웠다. admission committee로 들어오신 교수님께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우리 학교는 큰 연구기관이기 때문에 비슷한 연구를 하는 다른 교수님들도 계신다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셨는데 당연하게도 해당 학교는 떨어졌다.
내가 석사로 유학을 오게 된 것은 처음 박사 유학을 준비했을 때 박사로 지원한 학교에 모두 불합격했기 때문이다. 지원한 학교들로부터 모두 불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막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졸업한 상황이었다. 물론 잘 안 됐을 때의 차선책도 계획해 두기는 했지만, 결과를 알 수가 없으니 몇 달을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불안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알람이 울려 메일을 확인하면 피상적인 아쉬움을 담은 불합격 편지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지도 교수님께서 아직 마감이 되지 않았다면 석사를 지원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당시 연이은 불합격으로 아무런 기대감 없이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의 원서 접수 마감일에 지원서를 제출하였고 감사하게도 딱 일주일 후에 장학금과 함께 합격 메일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석사 이후에 또 다른 석사학위를 하는 것이기에 입학하고 나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한국에서 석사를 하는 2년 동안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맘 같지 않았고 조금은 지쳤던 것도 같다. 학기 초, 같은 과의 친구들은 다들 우리 분야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지만 나는 석사를 한 번 더 하고 있는 내가 조금 부끄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말이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은 너 이 부분 배웠었지? 하면서 나에게 많은 것들을 물어보곤 했는데. 부족한 영어로 인해 석사 과정 동안 이미 공부해서 알고 있는 것 마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때, 특히나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첫 학기를 보내고 나서야 스스로의 부족한 점도 돌아보고 이 기회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깨달았다. 석사 과정이 coursework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정말 원 없이 들어보고 싶은 수업을 이것저것 다 들어볼 수 있었고, 학교의 거대한 연구 규모 덕분인지 데이터가 정말 풍부해서 항상 궁금하게만 생각했던 데이터를 직접 활용해 연구해 볼 수 있었다. 언어적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도 많았지만, 영어 실력도 많이 늘어서 지난 학기에는 수업 조교로 일하면서 내가 누군가를 가르쳐주는 걸 좋아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이 분야를 좋아하는지도.
어제 내가 가장 가고 싶어 하던 학교의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인터뷰고 뭐고 아무 연락이 없길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학교에 가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휴대폰 상단에 메일 알람이 떴다. Welcome to로 시작하는 이메일이. "Congratulations on your admission to the PhD Degree program"이란 문장을 읽자마자 방 문을 열고 나가서 같이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나 합격했다고 소리쳤다. 너무너무 기쁜 나머지 친구들과 다 같이 안고 그 자리에서 몇 번이고 방방 뛰었다.
근 몇 년 간 박사 과정에 입학하는 것을 정말 간절히도 원해왔다. 간절히 원했던 만큼 안 될까 봐 불안한 마음도 정말 컸고, 그래서인지 늘 마음 한구석에 여유가 없고 쫓기듯이 불안했다. 사실 박사 합격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후의 길이 구만리인데 그냥 내 눈앞에 닥친 것이 너무 커서 다른 건 잘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무언갈 하면 무조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근 2년간 미국에서 다양한 생각과 배경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면서 삶에 조금의 여유를 가져도 괜찮다는 걸, 인생에 있어서 길이 하나가 아니라는 걸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원하던 걸 이뤄서 이렇게 기쁘지만 막상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나면 또 무언갈 새롭게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이다. 학위를 모두 마친 이후에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일 거다. 어떤 도전을 하든 간절히 원하지만 잘 안 될 수도 있고, 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거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고 조금씩의 여유를 찾아가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서로 각기 다른 문제로 힘이 들 때, 친구들과 자주 하는 말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We will be f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