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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Nov 19. 2020

빨래를 개다가








리우의 비 내리던 날 베란다에서

                                                                                                                                                                                                                                             



무엇을 딱히 할만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가만있고 싶지도 않을 땐, 빨래 걷기나 그릇 정리가 세상에 있다는 게 다행스럽다.



돌아온 공항에선 유례없이 모국어만 들려온다는 사실이 새롭게 낯설다. 모국어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필 그 뜻이 대개는 귀에 와 꽂혀버리니 곧 버거워지고, 외국어는 전혀 알아듣지 못함만으로도 자장가가 되기도 하는데, 모국어도 무심코 듣다 보면 어떨 땐 우리나라 말로 들리지 않기도 한다. 내게 익숙한 언어라는 사실과, 소리를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미리 뜻을 구성해버리는 버릇만 물려놓으면 종종 그렇게 된다. 





지하철 안 버스킹



노래 부르는 젊은이들과 따라 부르는 아주머니.




귀국 직후엔 잠시 한나절 한반도라는 외국에 산다. 있다 온 곳과의 대비로 의해, 우리나라 사람들 표정에 웃음이 꽤 적음이 뭉근히 아파온다. 이런 아픔에 곧 적응이 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갈 일이 뻔하게 또 아프다.

유럽은 침략한 이들의 땅이고 그들의 여유는 가진 자들의 그것이지라고 여기며 그들이 지금 누리는 것들을 그다지  부러워하지 않으려는 오기를 가져왔었다. 보이는 게 근사해봤자 상당히 빼앗아서 얻고 누리는 거라 생각하면 그리 숭앙할 일만은 아니다로  정리되었었으나, 남미를 보고 나니 그런 척도를 적용할 수 없어 난감하다.

빈부격차도 심하고 일부 지역엔 범죄도 무섭고 위정자 역시 부패했던 나라, 그런데 왜 어떤 나라 사람들의 일상은 웃음과 음악과 춤과 다정함이 끊이지 않은가? 여유가 되니까 누린다는 말은 그들에겐 갖다 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지하철에선 피곤해 조는 사람이 안 보이고, 저기 멀리 있는 할머니까지도 자기 자리로 끌어 모셔다가 앉히며, 지하철 안에서 떠들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면 아무도 조용히 하라고 핀잔주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따라 부르기까지 한다. 버스킹 하는 뮤지션들이 아닌 그냥 여느 젊은이들이 신이 나서 저들끼리 꽥꽥 흥이 나 부르는 것조차도. 

그러니까 사람 간, 세대 간에 서로 곤두서서 손가락질해대는, 증오가 팽배한 사회에서 확 드러나 보이는, 적어도 겉으로의 갈등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의 곳에서 살다가 보니 신기했다가 곧 이게 당연히 여겨지면서, 그렇지 않게 된 지금 우리 삶이 꽤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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