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기억이 무너질 때 인간의 윤리가 어디까지 남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범죄를 다루지만 폭력의 자극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은 불안이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자각 그리고 자각조차 의심해야 하는 상태.
김영하는 이런 불확실한 인식의 틈에서 인간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김영하는 한국 현대문학에서 가장 일관되게 정체성의 균열을 탐구해 온 작가다.
그의 인물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사회적 규범, 도덕, 기억, 심지어 감정마저도 임시적인 것으로 흔들린다.
그는 인간을 안정된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불안정한 조건 위에서 간신히 윤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존재로 묘사한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는 살인자라는 극단적 주체를 통해 인간다움의 최소 조건을 역설적으로 묻는다.
이야기의 화자는 연쇄살인을 저질러온 노인이다.
그는 스스로를 정리된 살인자라 믿어 왔고 자신만의 규칙과 윤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그의 삶에 침투하면서 기억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토대가 아니다.
오늘의 기록은 내일의 진실이 되지 못하고 확신은 곧바로 의심으로 붕괴된다.
소설은 이 불안정한 1인칭 서술을 통해 독자에게조차 판단의 근거를 허락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이 작품이 살인자의 회개나 악의 처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데 있다.
김영하가 집중하는 것은 범죄의 도덕성이 아니라 기억과 윤리의 관계다.
기억이 사라질 때 죄는 어디에 남는가.
자기 인식이 붕괴된 인간에게 책임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런 질문은 소설 속 살인자만의 것이 아니라 기억과 기록에 의존해 살아가는 현대인의 보편적 조건을 향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화자가 끝까지 자기 통제를 놓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기억은 흐려지지만 그는 여전히 어떤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쓴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스릴러를 벗어난다.
윤리는 선한 인간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라
무너지는 인간에게서조차 마지막으로 남는 긴장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작품을 하나의 키워드로 압축한다면 기억 이후의 윤리라 할 수 있다.
윤리는 명료한 기억 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이 붕괴될 때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를 더욱 절실하게 선택해야 한다.
이 소설의 화자는 신뢰할 수 없는 기억 속에서도 스스로를 완전히 방기 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의지를 보여준다.
그런 의지가 이 작품이 독자에게 남기는 가장 불편하고도 중요한 질문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이 주는 교훈은 명확한 도덕 명제가 아니다.
대신 삶의 태도에 관한 묵직한 성찰을 건넨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판단을 불완전한 기억과 감정에 기대어 내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불완전함 속에서도 어떤 선택만은 끝까지 지켜내려 하는가.
이 소설은 말한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완벽한 기억이 아니라
기억이 흔들릴 때에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윤리의 방향감각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스릴러로 읽히지만 끝내는 철학적 우화로 남는다.
김영하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조용히 놓아둔다.
“기억이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나로 남을 수 있는가.”
Hen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