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사운드캣 이준동 국장 <사진제공: Tommy Kim>
Tommy Kim
Tommy Kim(이하 타미김)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타리스트 중 한 사람이다. 지금은 기타리스트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작편곡가, 프로듀서, 디렉터, 제작자 등 다방면으로 음악적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룹 ‘H2O’ 외에도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의 근본인 ‘블루스’를 지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타미김 블루스 밴드’를 만들어 그만의 깊이 있는 음악세계를 창조해가고 있다. 조용필의 ‘헬로’ 앨범에 참여하면서 ‘제3회 가온차트 케이팝 어워드’에서 올해의 실연자상 연주 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데뷔 한지도 올해로 만 29년, 내년이면 30주년이 되는 굵직한 경력의 소유자다. 대략 집계해봐도 6천여 장의 앨범에 그의 기타 소리가 실려 있고 공연은 약 3천 회 이상 정도다. 또 본인은 ‘재능기부’라며 자신을 낮추기도 하지만 10년 넘게 교수의 자리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열정을 쏟아내고 있다.
음악과의 만남
그가 어린 시절 처음으로 접한 음악은 바로 딥 퍼플의 ‘In Rock’ 앨범이었다. 순간 록음악의 사운드에 매료되었고 그 후 데크와 전축으로 집에 있는 모든 테이프와 LP판의 음악을 하나하나 접하게 된다.
음악 감상에 푹 빠져 있던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외국 록 밴드의 뮤직비디오를 보게 되었는데, 허리를 뒤로 꺾어가며 현란하게 연주하는 기타 사운드와 영상이 그의 뇌리에 박히게 되었다. 테이프와 LP판으로 수없이 듣던 그 소리가 저 ‘기타’라는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되었다.
그 후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수많은 길거리 레코드 가게를 기웃거렸다.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대해 주인에게 물어보면 주인아저씨가 제목도 알려주고 운이 좋으면 공테이프에 노래도 녹음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내가 원하는 음악을 선별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상황까지 진화한 것이다.
아메리카 드림
음악을 조금씩 이해하다 보니 나에게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영어다. 그 당시 듣던 모든 음악은 가사가 영어로 되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에 심취하게 됐다. 미군방송이었던 AFKN을 들으며 억지로 영어의 귀를 뚫기 시작했으나 독학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버님께서 뉴욕 코넬대학의 교환교수로 가시게 되었고 아버지와 나만 미국으로 향했다. 나의 아메리카 드림이 시작된 것이다. 꿈속에서도 만나기 힘들었던 록의 제국 ‘미국’, 또 내가 간절히 배우고 싶었던 영어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영어 천국. 음악과 영어, 두 가지 모두 내가 너무나 바라왔던 일들이었기에 나는 미국에서 너무나 행복한 사춘기를 보냈다.
꿈에서 현실로
그렇게 미국에서 행복한 사춘기를 보낸 나는 다시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해보니 그 당시 시나위, 백두산, 부활 등이 한국 음악의 주류를 이루며 록 음악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특히 내 눈에는 백두산이 최고로 보였다. 뭔가 짜임새가 딱 짜여있는 음악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백두산의 연습실과 합주실에 무작정 찾아가기를 수백 번 반복했다. 무작정 찾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단 한 가지, ‘기타로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었다. 애걸복걸하던 나를 따뜻하게 받아준 이가 바로 천사 ‘김도균’이었다. 백두산 주위를 기웃거리게 된 것만으로도 기쁜 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백두산의 리더 ‘유현상’이 그룹에서 나가게 되고 김도균이 보컬까지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기타로 녹아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과 정말 수많은 공연을 함께 다니게 됐다.
그렇게 버티면서 겨우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다시 도미해 그곳에서 나만의 팀을 만들어 활동하며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 음악인들과도 교류를 하며 그들과 함께 소니뮤직에서 녹음하기도 있다. 미국인들과 밴드를 결성해 페스티벌에 나가기도 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더 많은 사람의 눈에 띄기 위해 할리우드에서 살아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아마 어려운 생활을 즐기는 나의 성격 덕에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음악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해외에서 음악인으로 살아본 소감은 참 간단하다. 우리나라는 밴드 하기 정말 힘든 나라다. 선진국의 경우는 내가 어느 프로 밴드에 속해 있으면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만큼의 수입은 개런티가 된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프로 밴드를 해도 불안한 수입을 늘 걱정해야 했으며 그들 모두가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상태로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한다.
옆 나라 일본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그들은 서양문화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 문화가 정찰할 수 있고 예술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도 함께 정착시켰다. 인위적으로라도 그 시스템을 유지시켰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다른 여타 나라에 비해 많이 다르다. 하물며 지금 음악을 하는 친구들도 자기 자식은 절대 음악을 시키려 하지 않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우리 대한민국 삼면이 바다고 북쪽은 막혀있는 한계 상황의 지역에 살고 있다. 인구도 많아 오밀조밀 살다 보니 옆집도 너무 가깝고……. 불안감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환경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름 조성되는 트렌드가 있다. 이 트렌드를 모르면 불안해야 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때문에 한국이라는 시대나 환경을 벗어나야 한다. 인터넷이나 진화되는 환경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충분한 플랫폼이 구축이 다 되어 있다. 예전처럼 이 작은 시장에서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는 너무나 좋은 시대다.
현시대의 음악 환경
지금이나 예전이나 환경이 허락한다면 좋은 악기, 좋은 기계를 갈망하는 것은 한결같다. 물론 예전은 그게 귀하다는 것을 아는 시대였고, 지금은 너무 흔한 시대라는 차이다.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너무 많은 혜택에 둘러 쌓여있으면 고마운 줄 모르고 끈기를 가질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20대는 내가 20대에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 다만 음악적인 시스템만 틀려졌을 뿐이다. 이 시스템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해 가고 있으며 이 진화 덕분에 지금의 젊은 친구들이 선택할 수 있는 플랫폼이 우리 시절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그들은 취할 것과 가릴 것을 판단할 수 있도록 우리 시절보다 더욱 진화했다.
기계가 너를 잠식하던 네가 기계를 잠식하던 중요하지 않다. 이 시대 젊은이들은 기계의 메커니즘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기계와 내가 혼연일체가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더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배고프고 힘든 시절을 견뎌봤다. 그런 시절을 거쳐 이제는 내 이름 ‘Tommy’를 걸고 커스텀 기타 브랜드를 만들 만큼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이제 우리 세대는 그저 ‘잘해보라’ 응원하면서 문을 열어주는 역할만 하면 된다. 우리 경험으로 정말 이 길은 아닌 것 같다 생각되면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톡 쳐주면 된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예능이라는 것은 트레이닝을 통해서 남에게 유희를 줄 수 있을 때 예능이고, 수행을 하는 기간은 체능이다.’ 이 체능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것이다.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무장해 버텨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