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사운드캣 이준동 국장
[Legend Interview] 강윤성, 영화감독
1994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기자는 중국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국 내에서 조선족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길림성의 성도 장춘으로 유학을 떠나는 길이었다. 6년간 장춘이라는 도시에 머물며 조선족 동포들의 삶 속에 파고들어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갔다.
말로 해도 믿기지 않을 일들을 직접 보고 듣고 때로는 당하기까지 했던 그 모든 기억들이 되살아난 것은 2017년 개봉된 한 편의 영화 때문이었다.
2017년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68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 영화, ‘범죄도시’
이 영화에는 기자 본인이 1989년 천안문 사태 5년 뒤였던 1994년부터 6년간 대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었던 중국, 그리고 조선족 동포라는 이름으로 한국인과의 마찰이 끊이지 않았던 그들과 함께 살아가며 직접 느껴왔던 조선족 동포에 대한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범죄도시’의 배경은 2004년 서울 가리봉동 차이나타운, 중국에서 건너온 폭력 조직을 일망타진한 강력반 형사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2004년 서울 남부경찰서(현 금천경찰서)는 왕건이 파를, 2007년 서울 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연변 흑사파 조직을 와해시켰다.
이 영화는 2004년과 2007년 벌어진 두 사건을 혼합해 구성됐다. 주인공 마석도 형사(마동석)는 당시 남부경찰서 윤석호 경장(현 수서경찰서 경위)과 광역수사대 장영권 강력반장(현 부산 사하경찰서 강력 3 팀장)의 장점을 모아 탄생한 캐릭터다.
범죄도시 제작진은 윤 경위에게 직접 자문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는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 동포의 삶이 사실감 있게 묘사될 수 있었다.
그리고 ‘범죄도시’의 중심에는 ‘강윤성’ 감독이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 영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영화인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자신의 많은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법을 연습하기도 했고, 영화 제작의 초석인 시나리오도 수 없이 쓰며 공부했다.
서른 살이 되어 처음으로 영화 투자 기회가 생겼지만 끝내 무산되었고 그 후로 ‘범죄 도시’라는 첫 영화를 제작하기까지 17년이 걸렸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영화감독을 꿈꾸고 있지만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강윤성 감독이 영화를 만들기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진솔한 인생 이야기를 직접 만나 들어봤다.
[영화감독, 강윤성]
안녕하세요. Legend 매거진 인터뷰로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반가운 마음입니다. 저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범죄도시’의 감독 강윤성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범죄도시’ 전에 많은 영화를 찍었을 것이고 히트시켰을 것이라 생각하시는데 사실 저는 범죄도시로 데뷔한 신인 감독입니다(웃음).
인터넷에서 저의 프로필을 검색하시면 범죄도시 이전 작품으로 2006년작 ‘신중현의 라스트 콘서트’가 보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정식 개봉한 영화는 아니었고 예전부터 음악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제가 신중현 선생님이 고희를 맞아 마지막 콘서트를 하는 장면을 담아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제작비 역시 제 사비로 만들었고 고희를 맞은 신중현 선생님의 인생을 재조명하고 헌정하는 의미를 가진 영화였죠.
돌이켜보면 저의 삶에는 항상 영화가 함께 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엄청난 ‘영화광’이셨었죠. 당시에는 가정 형편 때문에 자주 극장에 가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토요일마다 방영됐던 ‘주말의 명화’를 어머니와 함께 보면서 자연스럽게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TV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한 ‘윤석화’ 선생님이 본인의 소개와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 방송이 저의 인생의 방향성을 잡아주었고 저는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저는 물리학과를 전공했지만 영화에 관심이 많아 영화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영화감독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고 단지 영화가 좋고 영화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그 후 군에 입대해 우연히 보았던 영화 ‘저수지의 개들’을 보고 저의 꿈을 영화감독으로 정하게 됩니다.
그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독특한 캐릭터들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싶은 강한 의지가 생겼습니다. 그 후 어떻게 시나리오를 쓰는지, 그리고 어떻게 영화를 만드는지 등 시나리오와 영화 제작에 관련된 모든 것을 익히기 위한 독학을 시작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1994년, 대한민국에 ‘프리미어’라는 영상 편집 프로그램이 처음 선보였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컴퓨터로 영상을 편집한다는 것이 보편화되어있지 않았지만 저는 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고, 직접 뮤직비디오를 만들면서 프로그램 사용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처음 16mm 필름으로 촬영한 단편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 당시에는 필름을 데이터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작한 영화 필름을 영사기에 돌려 벽에 쏘아 다시 그 영상을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해 데이터화 시켜 편집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것이 1996년 처음으로 제가 만든 단편영화였는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 영화가 ‘대학 단편영화제’에 초청 상영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강윤성’이라는 이름을 조금이나마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죠. 그리고 같은 해, 영화를 만들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나 쉽게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컴퓨터 영상편집’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제작했던 단편영화와 출간된 서적이 포트폴리오가 되어 미국 대학원 과정에 합격했고 1997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저는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안에서 ‘미국에서 단편영화 두 편을 꼭 만들어내겠다’라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는 철 단계로 ‘네거티브 이미지’라는 미국 사람들의 삶에 대한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영화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한국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 인디포럼 영화제에 초청을 받아 한국에서 상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와 함께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감독이 류승완(베테랑), 그리고 김성호(거울속으로) 감독 등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단편영화를 만들고 한국에서 상영되는 일들이 생기면서 저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커졌습니다. 이에 1998년에는 미국 현지에서 직접 저만의 영화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정식으로 장편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워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멕시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써서 제작계획서, 프로덕션 소개서와 함께 한국의 영화 투자사에 발송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메일이 보편화되어있지 않아 직접 DHL로 일일이 발송했던 추억도 생각나네요.
그중 ‘삼부 프로덕션’이란 곳에서 투자를 결정했고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삼부 프로덕션의 직원이셨던 김익상(현 뮈토스 대표)씨의 적극적인 추진 덕분에 4억 원의 투자 유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멕시코 국경 지역으로 넘어가 현장 조사와 촬영지 헌팅, 그리고 영화 제작에 참여할 스텝들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도 삼부 프로덕션 측으로부터 투자금이 입금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상황을 알아보니 삼부 그룹의 회장님이 구속이 되는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2000년 1월 한국에 직접 와서 본 상황은 전해 듣는 것보다 더 나빴습니다. 저는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고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아메리카 필름마켓’이란 행사를 통해 미국 현지의 투자를 받아보려 노력해 봤지만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제가 준비한 시나리오만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여 시나리오를 각색한 서적을 출판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때 결심한 것이 ‘한국에서 먼저 영화를 만들자’였습니다. 저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한국에서 개봉할 ‘뫼비우스’라는 공포·스릴러 영화의 시나리오를 완성했습니다. 예전 인연을 맺었던 뮈토스의 김익상 대표가 다시 관심을 가져주셨고 함께 투자를 받아 2000년 7월 영화 제작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투자유치와 와 캐스팅까지 다 마무리된 상태에서 주요 투자사 한 군데가 상황이 나빠져 투자금의 일부를 돌려주게 되었고, 이 부분을 메우기 위해 저와 김익상 대표가 함께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결국 만들지 못하고 2001년 9월 좋지 않은 결과만 남긴 채 이 프로젝트도 끝을 맺게 됩니다.
이 일이 제가 31살 때 일이었기에 저는 ‘일찍 기회를 잡았고 일찍 시련을 맛보았다’라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저를 다잡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개인 프로덕션을 다시 차리고 뮤직비디오 등 영상물을 제작하며 다시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2003년 즈음, 김성수 감독님이 당시 최고의 스텝진을 구성하고 ‘장혁’이라는 배우를 필두로 하는 ‘영어 완전 정복’이라는 영화를 제작 중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제작 스텝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연출가를 구한다 하여 제작에 투입되었고 이 영화를 계기로 김성수 감독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으며 메이저급 분들과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힘입어 다시 영화를 준비했지만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을 준비하다가 모두 무산되었습니다. 30대 때에는 영화를 하면서 힘들었던 시간은 있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내공을 쌓는 수련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40대에 겪는 시련은 그 크기부터 달랐습니다. 일단 저는 가장이었고 제가 벌고 있는 돈은 우리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40살이 되던 해 이렇게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아 아내와 함께 삼청동에서 구둣가게를 시작했습니다. 예상보다 장사가 상당히 잘되었지만 계약을 1년밖에 하지 않았고 재계약을 하지 못해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아내와 저에게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고 돈걱정 안 하고 살았던 추억을 얻었죠.
저의 아내는 다시 여성의류 매장을 운영했고 저는 아내를 도우며 영화 준비를 이어갔습니다. 아내의 의류매장은 지난 구둣가게처럼 장사가 잘되었고 저는 의류매장을 연지 2년 차 되던 해 ‘범죄도시’라는 작품을 구상하게 됩니다.
이 범죄도시의 일등공신은 마동석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예전부터 안면이 있었던 동갑내기인 마동석 배우와 친해지게 되었고 함께한 술자리에서 마동석 배우의 아는 후배 형사가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2004년 실제로 가리봉동에서 조선족 동포 사회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담당했던 윤석호 형사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 실제 사건과 인물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집필했고 시나리오를 완성해 투자자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범죄도시 역시 3년을 준비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저에게는 마지막 영화였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오랜 시간 영화를 하기 위해 인생을 마쳤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저희 가족이 나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죄도시가 잘 안되면 영화를 그만 둘 각오로 덤벼들었습니다.
지난 영화들이 그랬듯이 범죄도시 역시 투자자를 찾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저는 46살이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서른 살부터 마흔여섯의 나이까지 너무 긴 시간만 허비하고 한 우물만 판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범죄도시의 투자를 제안했던 많은 투자사들 가운데 마지막 투자자에게 거절을 당하고 저는 영화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와이프도 5년간 운영했던 의류매장을 정리하고 저희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려운 삶 속에서 그동안 삶이 너무 척박했기에 아내와 함께 한 마지막 사치였죠(웃음). 여행 중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투자자를 찾았다는 한 통의 문자. 그것이 저의 인생을 바꾸었고 범죄도시라는 영화를 탄생시켰습니다.
보통 영화 촬영을 시작할 때는 고사를 지내는데 그 고사를 지낼 때 비로소 ‘아, 내가 이제 영화를 찍는구나’라고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찍는 내내 너무 행복했고 즐거웠습니다.
예전에 ‘내가 앞으로 감독이 되면 이렇게 하겠다’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투자사와 제작사가 신인감독이었던 저를 믿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현장에서 최고 결정권자가 되었지만 모든 스텝, 배우들과 항상 논의를 이어가며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스텝과 연기자가 하나 되어 혼신을 불태웠죠. 그리고 우리 범죄도시를 빛낸 두 인물이 있는데 바로 마동석 배우와 윤계상 배우입니다.
마동석 배우는 예전부터 친한 친구였습니다. 조연으로 활동하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무렵 함께 영화를 하자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죠.
마동석 배우는 아는 동생이 형사인데 그 친구가 가리봉동에서 직접 겪었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범죄도시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동석 배우가 일등공신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윤계상 배우는 지인분께서 추천을 해주셨는데, 문뜩 떠오르는 생각이 악역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악역을 하면 인상적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전 풍산개에서 보여줬던 남성미가 기억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면 정말 잘 해낼 것 같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만난 자리에서 윤계상 배우는 ‘본인 안에 악마가 있다’라며 ‘이것을 꺼낼 수 있도록 감독님께서 도와달라’ 얘기할 때 이 배우의 캐스팅은 완벽하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저의 그 직감은 적중했고 마동석 배우와 함께 최고의 연기를 펼쳐준 윤계상 배우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실 범죄도시는 예산이 47억 원 정도에 불과한 작은 규모의 영화였습니다. 적은 예산으로 제작하다 보니 사용할 수 있는 장비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 조금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지만 예산안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들은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이 두 배우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범죄도시의 성공으로 저에게는 30편 이상의 시나리오가 전해졌습니다. 차기작을 준비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꼼꼼히 읽어보았는데 그중에 ‘롱 리브 더킹’이라는 작품이 눈에 들어왔죠.
롱 리브 더킹은 원래 웹툰인데 원작자가 직접 영화화할 수 있게 시나리오로 각색을 해서 저에게 보내주었습니다.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거라 확신했고 현재 40% 촬영을 진행 중입니다.
현재로서는 저 스스로 상당히 만족스럽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번 작품 역시 최고의 스텝과 배우가 함께하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전작 범죄도시의 성공에 대한 부담감은 내려놓고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기도 하고요.
‘롱 리브 더킹’은 목포에 있는 건달이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건달 생활을 청산하고 국회의원에 출마해 정치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따뜻하고 행복한 느낌의 로맨스 영화입니다.
우리 스텝과 배우 모구 혼신의 힘을 다해 촬영하고 있는 롱 리브 더킹은 내년 국민 여러분께 극장에서 선보이게 될 것입니다. 많은 응원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인터뷰를 하며 저의 이야기를 진솔히 담아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것에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저의 곁을 지켜주는 저의 아내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저의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 새롭게 열리는 2019년에는 원하시는 모든 일이 꼭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라며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