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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Oct 06. 2019

[영화] 기생충 : 20191006

  뒤늦게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생각보다 덤덤했다.  누군가는 영화를 보고 두렵다면 상류계층이고 찝찝한 기분이 들면 하류 계층이라고 했다.  굳이 그 두 가지의 기분 사이에서 지점을 찾자면,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에서 내 기분은 부유했다.  반지하의 냄새를 이해하면서도 영화의 기제로 사용되었음이 생소했고, 상류층의 삶을 알 듯하면서도 너무 가벼웠다.  남은 것은 재치와 코믹 사이에서의 여운이었고, 대체 무엇이 야한 장면이라는 건가 하는 의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화장실에 앉았는데, 갑자기 옆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가을이라 그런지 밤이면 요즘 벌레들이 집 안에서 종종 출몰했다.  욕실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은 발로, 열심히 튀어나가는 녀석을 찍어내리듯 밟았다.  바퀴벌레의 배 옆구리가 터지면서 체액이 바닥에 튀었고, 녀석은 놀라서 더욱 발버둥 쳤지만 충격과 상처로 속도는 느려졌다.  20센티 정도 달아나더니 녀석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화장실에 앉은 자세 그대로 다시 한번 녀석을 슬리퍼로 밟았다.  


  용변을 다 보고 일어나 화장지를 조금 두텁게 뜯었다.  적당하게 말아 그걸로 바퀴벌레를 집어 들려고 하니 녀석이 갑자기 몸부림을 치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한 번 더 발로 밟았다.  녀석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얼른 녀석을 화장지로 집어 들어 변기 안으로 던져 넣고 물을 내렸다.  물에 녹은 화장지와 함께, 녀석의 모습은 아주 쉽게 사라져 버렸다.  


  문득 반지하 냄새라는 단어와, 으리으리한 집의 어두운 지하 벙커가 생각이 났다.  영화에서는 냄새가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바퀴벌레는 모습이 혐오의 대상이었다.  몇 년을 조용히 숨어 살 때엔 명줄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결국 나올 수밖에 없었던 순간 바로 죽임을 당했다.  녀석도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어디선가 제 명을 유지하며 살았을 것이다.  내 시선은 영화의 어느 위치에 머무르는 것일까..  고작 갑자기 튀어나온 바퀴벌레 한 마리 바라보는 것이지만, 나는 순간 대저택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가난의 냄새는 쿰쿰했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가 그랬다.  땅 위에 지은 집이었어도, 배가 좀 새는 지붕 아래엔 습한 날이면 여지없이 곰팡이 냄새가 났다.  대학 자취 시절, 반지하 생활은 나에게도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경험이었다.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방 안과 옷에 쿰쿰하게 배어도, 그것은 일종의 당연함이었다.  그것이 인간의 계급을 나누는 하나의 기준이 될 거란 상상은 불가능했다.  순진해서였는지 너무 당연한 환경에서 살아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 안에서 인간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기제가 되었던 그 냄새는, 내 삶 안에서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당연함이었다.  지금도 그 냄새라는 것을 맡게 된다면, 그것으로 계급을 구분 짓지는 않을 것 같다.  영화는 나에게 냄새가 계급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삶의 이런저런 지형을 밟고 넘어와, 이제는 냄새로 계급을 구분하는 세상이 되어다 해도, ‘반지하 냄새’ 같은 것이 배이지 않은 삶을 사는 위치에 있다.  그렇다 해도, 의미 깊은 대 저택에 방공호를 두고 집사와 운전기사를 거느리고 사는 부유한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위치는 아니다.  갈망하지도 않지만, 영화가 설정한 첨예한 두 계급 사이에서 나는 어중간한 위치까지는 이른 셈이다.  그 어중간함이 누군가의 영화평 안에서 결국 덤덤함만 느끼게 만든 것은 아닐까..  사실 현실적으로 대입해보면 영화 속 가난한 가족은 마냥 가난하기엔 너무 노련했고, 부유한 가족은 사회적 위치에 비해 너무 어설펐다.  가난은 자신에 내재된 능력마저도 풍화시키고 침식시킨다.  오늘날의 부자들은 교양 있고 노련하며 풍요로운 지식을 가지고 주변을 아우른다.  어쩌면 비현실적인 설정이 나에게 재치와 코믹의 여운만 남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 후에 만난 바퀴벌레를 밟아 숨이 붙은 것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버리는 행위에 생각이 많아졌다는 것은, 영화의 힘일 것이다.  내 안에 내재된 가난의 추억, 영화 속 부자는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나는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반지하의 냄새, 그리고 내 시야에 발각되자마자 아주 쉽게 죽음을 맞은 바퀴벌레 한 마리.. 계급으로 직조되어 흐르는 세상의 흐름 안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하는 여운에 잠시 몸을 멈추었다.  나의 이기심이나 사다리를 오르려는 열망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몸과 시선을 어떻게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잠시의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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