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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Nov 06. 2019

[영화] 밀양 : 20191106

   1.

   신애는 격렬한 혼란 속에 빠져버린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해주러 간 자리에서, 이미 회개하고 용서받았다는 그의 목소리에 표정은 급격하게 얼어붙고 혼란스러워진다.  용서의 주체는 누구인가, 대체 내가 아니면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 놈을 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  신애는 순간, 남편에 이어 자식마저 잃고 난 후 고통에 절어 있을 때,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었던 하느님의 존재를 망각했다.  망각은 분노가 되어 거부와 반항으로 이어진다.  존재를 부정하진 못한다.  존재가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에서, 그에게 신앙으로 순종하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이간질해 나간다.  그가 실망하고 분노할 수 있도록 말이다. 


  신애는 신앙 안에서 고통을 극복했다고 생각했지만, 같은 신앙 안으로 들어온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 놈’의 ‘용서 받음’에 분노하며 다시 고통받는다.  종교는 모든 것을 평온 안으로 잠식시키려 하지만, 각자의 갈등을 온전히 해소시키지 못한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주님’ 아래 우리는 모두 평온하지만, 실제 세상을 사는 인간들은 쉽게 그러하지 못한다.  교회 안에서의 표정과 교회 밖에서의 표정이 다르다.  평온하지 못하되 일상에 큰 고통이 없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정해진 공간인 교회에서 평온의 증표를 받아 나온다.  마치 부적처럼 말이다.  신애처럼, 격렬한 실존적 고통을 안은 이들도 평온의 증표를 받아 들지만, 그것이 정말 고통을 낫게 하는 효험 있는 부적인지 타인은 알지 못한다.  고통은 종교 안에서 누그러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의 본질이 해소된 것인지, 애써 눌린 불안의 상태인지는 본인도 쉽게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종교는 어쨌든 고통을 줄이거나 망각할 수 있는 진통제 또는 마약 같은 효능이 있다는 사실이다. 

  2.

  솔직하게 말해서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종교는 기독교이다.  물론 다른 많은 종교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일부러 기독교라 정해두고 말하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기독교는 인간 실존의 문제에서 해악이 크다고 생각한다.  다시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한기총이나 전광훈 류의, 최근 광화문에 모여 양아치 짓을 하는 가치 없는 것들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가치 없어 언급할 필요도 없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류 기독교가 현대사회에서 강요하는 평온과 순응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어쩔 수 없이 가지는 갈등을 애써 외면하고, 체제와 자본이 추구하는 흐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든다.  ‘주님 안에서의 행복’은 점점 벌어지는 계급 간 차이가 야기하는 불행을 외면한다.  발전이 역으로 만들어내는 존재에의 위협을 망각하게 한다.  반지하 셋방에서 세 모녀가 이유 없이 죽어나가도, 번잡한 사회 안에서 자리 잡을 곳 없어 젊은 청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나가도 매주 일요일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교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의 계급성을 확인하고 부적처럼 평온을 받아간다.  전 세계의 곳곳에서 난민이 발생하고, 바다를 건너다 세 살 아이를 안은 아빠가 함께 죽어 해변으로 밀려와도, 주님이 지으신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파한다.  아마존의 밀림이 산업발전의 명목으로 불태워지고, 바다에는 플라스틱이 섬처럼 떠다니며, 새들과 거북과 고래의 뱃속에서는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와도, 주님의 축복을 받은 인간의 삶은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매주마다 반복한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주님의 축복 안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지 모른다.  자신의 고통이나 갈등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초월한 마음을 가진 채, 오로지 주님 안에서 행복하다는 일종의 ‘소마(SOMA)’를 투여받은 이들..  ‘진열창 안으로 조용히 쏟아지는 햇살처럼 우리 주님의 축복도 그렇게 쏟아지고, 우리는 그 아래에서 축복을 받으며 살고 있다’고 신애에게 말하는 신실한 약사 부부처럼 말이다. 

  3.

  우리가 흔히 저지르면서도 쉽게 깨닫지 못하는 실수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믿는 신이 절대적 진리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신애가 살인자와 대면하며 용서를 논하는 장면은 ‘하느님은 절대적 진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누구든 쉽게 답을 내릴 수 없게 한다.  하느님이 진리라면, 신애의 분노는 거짓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살인자는 파렴치함을 덧쓰는 결과에 이른다.  이 절묘한 상황 앞에서 바뀌어야 할 것은 질문이다.  ‘진리는 무엇인가?’로 말이다.  진리는 무엇도 아니다.  적어도, 인간이 사고하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상과 종교와 사회체계 안에서는 말이다.  진리는 인간의 그 어떤 무엇 위에 존재하는 절대 질서이자, 무형인지 유형 인지도 알 수 없는 짐작 불가의 어떠함이다.  절대 진리 아래에서 인간이 사고하고 행위하는 모든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마치, 우리는 서로와 엉겨 붙어 아웅다웅하고 살고 있지만, 우주 멀리서 우리가 사는 지구를 바라보면 창백하고 푸른 작은 점이듯 말이다.  만일 절대 진리가 단정해버린다면, 분노하는 신애도, 사람을 죽이고도 평온과 용서를 얻은 살인자의 파렴치함도, 신의 축복을 받으며 평온하게 살고 있다 자부하는 약사 부부의 신실함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진리는 인간의 모든 갈등과 고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알 수 없음의 저 멀리 높다란 영역에 존재하는 진리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 진리의 어떤 느낌을 인지하는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은 무명으로 태어나 무명으로서 공부하며 무명으로서 죽는’ 일 밖에 없을 것이다.  


  신애는 살인자의 딸이 자신의 머리를 다듬게 놔두고 몇 마디 나누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모든 걸 집어던진 다음 미용실을 뛰쳐나간다.  용서할 수 없음 또는 용서되지 않음에 대해 우리가 더할 수 있는 말은 얼마나 될 것인가..  집 마당에서 거울을 보며 스스로 머리를 다듬는데, 옆으로 내리는 추운 날의 맑은 햇볕(sunshine)은 정돈되지 않은 마당 한 구석을 비밀(secret)스럽게 비춘다.  그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신애를 용서하는 신의 따사롭고 조용한 자비일 수도 있고, 신애가 겪은 고통과 감정의 격렬한 파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절대 진리의 무심함일 수도 있다.  해석은 바라보는 이에게 달려 있다.  인간의 영역 안에서 신의 섭리를 느끼거나, 인간의 영역 바깥에서 절대 진리의 자연함을 느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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