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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Dec 09. 2019

[영화] 위플래쉬 :20191209

  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2011년 3월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캔모어 중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의 교사와 교육열을 언급한다.  그 전에도 이미 한국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 번 언급한 적 있는 그는, 한국 교육을 미국 교육개혁의 롤 모델로 제시했다.  물론, 그가 초등학생도 밤 열 시까지 학원에 다니고, 성적에 내몰려 자살하며, 운동할 시간이 없어 밤 10시 실내 농구수업을 하는 체육관을 학원처럼 찾아다니는 한국 학생들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알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요지는, 이제껏 전 세계의 사회발전과 문화를 이끌어오던 서양문화권에서,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의 ‘혹사 또는 혹독함’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시선의 새로움이 느껴지고, 시야가 달라지는 현상이지 않을 수 없다.


  미국 한복판의 재즈를 가르치는 음악대학에서 보여지는 플렛처 교수의 수업방식이 그런 느낌이다.  그를 둘러싼 문화와 환경을 생각하면 그는 무척 이색적이며 어색하다.  마치 모네가 그린 기모노를 입은 여인을 보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딘가 익숙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정시에 강의실로 들어오는 플렛처와 동시에 자리에 일어서서 부동자세를 취하는 학생들, 모욕과 협박에 가까운 윽박이 수시로 벌어지고 결국 쫓겨나는 사람까지 발생하지만 그것을 묵묵히 감내하는 모습..  80-90년대 한국 공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나에게는 긴장보다 오히려 친숙함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학교 기숙사 생활을 했다.  일요일 오전 6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을 제외하면, 방과 후 거의 모든 시간을 기숙사에서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원로 사감은 ‘3당 4 락’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것은 협박이었다.  협박에 두려워 정말 3시간 자고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SKY대를 최대한 많이 보내려 학교는 애썼다.  ‘머리로 날아온 심벌즈가 없었다면 찰리 파커도 없었다’는 플렛처의 말처럼, ‘3당 4 락’은 우리 머리 위로 던져진 심벌즈였다.  그것이 정말 찰리 파커를 만들고, SKY대를 많이 보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증명할 길은 없다.  그러나, 플렛처는 작심한 듯 앤드류의 머리를 겨누어 심벌즈를 던진다.  소소하게 나눈 대화마저도 모욕과 협박거리로 만들어 폭언으로 쏟아낸다.  미친 듯이,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연습해라.  그것을 뛰어넘어라.  눈 앞에서 침 튀어가며 그렇게 폭언을 쏟아내고 혹독하게 연습을 시키는 모습은, 새벽 5시 반이면 운동장으로 우리들을 불러내고 잠깐의 체조 후에 자습실로 몰아넣던 사감의 모습이었다.  


  벗겨지고 피가 흐르는 손으로 연습을 쉬지 않는다.  플렛처의 바람대로, 인정받고 뛰어넘는 훌륭한 드러머가 되기 위해 여자 친구와도 헤어진다.  앤드류는 드럼에 자신의 열정과 자존심을 온전히 녹여 넣는다.  실력이란 그렇게 만들어지고, 고난과 노력은 당연하다.  그러나, 플렛처가 강요하는 험난과 자괴까지 앤드류가 감당해야만 했을까?  이 지점에서 인간의 지고한 열정과, 그것에 덧씌워지는 동양적(?) 혹사 또는 혹독의 관계를 직시한다.  인간은 열정만으로 훌륭해질 수 없는가.  훌륭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 그런 혹사 또는 혹독은 정말 필요한 것일까..  선생으로서 플렛처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선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오바마 역시 혹사 또는 혹독의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플렛처라는 인물을 만들어 낸 감독은, 혹시 오바마의 주장과 의지를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끝까지 악역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플렛처에게 앤드류는 복수를 감행한다.  영화 마지막의 압권, 그것은 복수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끝으로 향할수록, 복수는 완벽하게 복수가 되는지 아니면 두 사람의 화해로 승화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보는 이의 가슴과 시선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마지막 드럼 씬은, 플렛처의 승리인가 아니면 앤드류의 완벽한 독립이자 결별인가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눈 앞을 번쩍이듯 내려치는 채찍(whiplash)처럼 끝나며 엔딩 크레딧으로 넘어간다.  여전히 남는 건 플렛처라는 인물이다.  유창한 영어로 찰지게 욕하고 소리 지르는 백인 꼰대의 모습에서, 동양적 혹독함이 느껴진다.  지극히 미국적 음악인 재즈를 가르침에 동양적 혹사를 주저 없이 대입시킨 인물을 그려낸 감독의 의도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자체만으로도 실력 있는 드러머 앤드류를 받아들일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만하면 잘했어’라는 말이 정말 쓸 데 없는 것인지 고민된다.  우리는 대체 얼마나 혹사를 당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세상은 얼마나 혹독해져야 하기에 오바마는 한국 교육을 주시하는가.  플렛처의 의미, 어째서 이런 성격의 인물이 영화의 중심에 서야만 했던가의 지정학적, 시점적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드럼과 스틱에 뿌려지는 앤드류의 피도 모자라, 파르라니 밀어버린 플렛처의 관자놀이에서 욕설을 날릴 때마다 두텁게 불거지는 핏줄이, 꼭 그래야만 하는가 라고 나에게 의문을 남기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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