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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werld Mar 13. 2023

신경성 폭식증과 거식증, 식이장애의 시작

나만의 기록이자 함께하고 싶은 분들 혹은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 

  [식이장애]라는 단어가 요새에는 그래도 예전만큼 낯선 단어로 남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투버에 식이장애만 쳐보아도 많은 강연 및 의사분들의 영상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식이장애를 사회의 문제에서 발현된 문제라며 원인을 돌린 적은 없었지만(왜인지 변명을 바깥에서 찾고 있다는 생각에) 생각의 원인의 꼬리를 잡을수록 생각 보다 우리 주위의 많은 모든 곳들에서 우리는 그런 말들을 듣고 교육받아 살아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정상범주에 있긴 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브런치에는 이상하게도 편안하게 오픈할 수 있었던 나의 식이장애. 그리고 드디어 정신상담과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치료를 진행하게 되면서 내가 느낀 사항들 및 과정들을 나의 기록과 더불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이 글의 시작을 하게 되었다. 


  나의 식이장애는 9-10년 차가 되어간다. 오랜 기간 사업을 운영했었을 때에 혼자 남아 야근을 하게 될 일이 많았었다. 직원들 앞에서는 보이고 싶지 않았던 불안함의 모습들을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과자와 빵으로 풀기 시작했던 것 같다. 흡연은 했으나 심하진 않았었고 술은 몸에서 받지 않아 즐기지 않았으므로 나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당장의 방법은 과자보다 저렴하고 쉬운 것이 있었을까. 그러다 보니 과자를 다섯 봉 여섯 봉을 사 와 서랍 안에 챙겨두곤 와그작 부서지는 소리와 식감을 즐기며 일을 했고 그러다 보니 살이 (당연히) 찌게 되었고 역시나 건강에도 좋지 않은 신호들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했다. 당장 일은 그만둘 수가 없었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업이었기 때문에(사업과 나를 분리하지 못했다) 나름의 해결책으로 찾았던 것이 먹토였다.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맛을 느끼고, 크런치함으로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고는 혼자 남은 건물 화장실에서 먹토를 하고 나면 건강을 해치지 않을 거란 지극히 단순하고도 말도 안 되는 공식을 만들어 지켜왔다. 그게 한해 한해 익숙해지며 야근이 많아지거나 극도의 스트레스가 생기는 날은 집에서도 그런 행위를 해왔고, 혼자 살았기 때문에 누가 알 수는 없었다. 겨울에 특히나 면역력이 낮아져 한두 번씩 위경련으로 응급실을 실려갈 정도의 해프닝이 1-2번씩 연례행사처럼 찾아왔지만 그게 이 행위와 연관이 있다 할 만큼 일상생활에 큰 피해를 줄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 먹토의 폐해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2019년 말 사업을 정리하게 되었을 때 즈음 스트레스가 극에 다 달았고 그 스트레스와 함께 자존감이 무너졌다. 나와 동일 시 되었던 사업이 정리가 되니 내가 없어지는 상실감이 생겼다. 직원들을 하나 둘 보내고 마지막에 남아 모든 재고들과 내가 이제까지 해왔던 모든 것들을 정리하면서 내놓은 사무실에 매일 나가 새로운 임대인과의 계약이 성사될 때까지 혼자 정리하던 그날들이 정말 힘들었던 것 같다. 어쨌든 사무실은 새 주인을 찾았고 나의 사업도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리던 긴 연휴를 맞게 된 것임에도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찾지 못한다며 우울함이 밀려왔고 그 우울함의 영향이었는지 사귀던 연인과도 이별했다.  집에서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코로나가 터졌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불편해지는 상황이었고 그나마 바깥에 나가 풀던 그 기분조차도 그 집안에서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만 했다. 그때 처음으로 배달 앱을 깔게 되었다. 가능하면 식사도 바깥에 나가는 이유가 되는 나로서는 식당이나 내가 간단히라도 만들어 먹는 편을 선호했었고 일인의 배달이 생각보다 비싸게 느껴졌기에 쉽게 사용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코로나가 시작되니 바깥에 나가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었고 배달 문화도 정점을 찍은 그 시점에 시작 한 배달 앱은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내가 가고 싶었던 빵집과 디저트 집들 및 밥집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손가락 몇 번만 튕기고 나면 배달 주문이 완료되어 집 앞에 와있었고,  점심 저녁 두끼에 나눠먹거나 내일까지 먹으면 되지 라며 그동안 궁금했던 맛집들의 음식들을 매일매일 시켰다. 쌓이는 음식들은 나를 더욱더 폭식하게 만들었고 그 폭식들은 먹토로 연결되었다. 그때 즈음에, 언니가 나의 이상함을 눈치챘던 거 같다. 전화할 때마다 우울함이 묻어나서였는지 촉감이었는지(먹토와 폭식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언니네 집에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같이 베이킹을 하고 언니가 해준 음식들을 먹으며 그날만큼은 사람답게 시간을 잘 보냈던 것 같다. 


  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나가며 우울함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첫 번째로는 이사를 선택했다. 좀 더 분위기가 밝고 살아보고 싶었던 동네로 이사와 더 자주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삼 개월 동안 거짓말 안 보태고 사-오십채가 넘는 집을 보았던 것 같다. 그동안은 다행인지 집 찾는 일과 그 일의 스트레스가 더 커져 먹토가 잦아졌었다. 정말 우연히도 좋은 집을 찾게 되었고 그 김에 바로 이사를 진행했다. 나의 우울한 과거를 모두 이전 집에 버리고 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뭔가 희망적이었다. 이사를 하였고 그 동네에 공원도 많아 이전보다 확실히 외출 횟수가 잦아졌지만 습관이란 게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이사를 마치고 다른 열중한 것을 찾았다. 새로운 직업으로 염두하고 시작했던 필라테스 인스트럭터 과정은 생각보다 "보이는 것이" "더" 중요했던 현실 때문이었는지 먹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같은 깃수의 친구들과 수업이 끝나고 몰아 먹은 식사도 집에 오면 얹힌 듯이 남아있어 다시 뱉곤 했었다. 이 습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때즈음엔 이미 일상생활이 자연스럽지 않은 상태였지만 가족에게도 누구에게도 창피함에 말할 수는 없었다. 엄마 집에 주말에 들러 묵게 되었을 때에 엄마가 눈치채신 거 같았지만 물어보지 않으셔서 말씀드리지 않았다. 우울함과 먹토의 습관이 줄어들지 않았기에 차라리 부모님이 계신 곳에서 잠시나마 같이 살아보기로 했다. 두 분이 그때에 태국에서 머무르셨기 때문에 태국으로 떠났다. 두 분이서 사시는 작은 집이었기 때문에 화장실에서 일을 보아도 서로가 들을 수 있는 완벽한(?) 공간이었으므로 확실히 먹토의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곳에서 한 달 반을 생활했고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았던 사람들이 만나 작은 공간에서 24시간을 붙어있자니 나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불편하셨던 것 같다. 먹토 이외의 다른 문제들이 서로에게 불편함을 안겨주었고 결국은 집을 나와 친구를 만나 여행을 시작하여 두 달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하며 잊힌 것 같았고 정말 많이 나아진 것 같았던 나의 식이장애 습관들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나를 백수로 만들어 놓는 이 현실에 놓이게 하며 다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한국 사회의 특성인지 여행이란 단어가 주는 특별함 때문인지 여행이란 판타지에서 돌아온 한국은 나에게 현실이었고 현실은  다시 내일 일어나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스스로 나아감의 자아 탐구가 아닌 그저 우울감을 동반한 한심한 한량으로 나를 만들었다. 지금도 알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가 주어진 그 어떤 소명 혹은 나의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만으로도 행운이고 이것을 알게 된다면 삶이 더 재미있어지고 의미 있어지고 오버하자면 나를 넘어 그 누군가에게도 이로울 수 있을 것이며 이런 모든 고민과 사고의 과정을 거쳐 다음의 직업도 훨씬 나의 가치와 근접하게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음을 말이다. 또한 이 시간이 매일에 쫓기는 삶에서는 생각조차 해볼 수 없는 것임을 정말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해보고 싶었다. 이 시간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고 사실 또한 현실 복귀 이후 더 잦아진 먹토로 인해 목 밑 침샘이 비대해지는 현상이 시작되며 내가 눈으로 내 몸이 큰일 날 수 도 있겠구나를 느끼게 되며 네이버에 식이장애를 검색해 보았다. 가장 먼저 커뮤니티 카페가 먼저 보였고 그곳에 가입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와 같은 현상으로 고생하고 있었으며, 생각보다 많은 정보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많은 글들을 읽다 보니 생각이 더 정리되어 갔다. 병원에 가야 한다.. 그 카페에서 추천해 준 식이장애 전문 병원리스트들을 뒤로하고 동네 근처로 찾아보았다. 그 리스트들의 병원들은 보통 이미 예약이 꽉 차있어 기다려야 한다는 글들이 있었기에 그러다간 지금 다잡은 의지가 없어질 것만 같았고 쉽게 달려갈 수 있어야 지금의 이 의지가 꺾일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총 세 군데가 추려졌고 전화를 돌려보니 당장 그날 가능한 곳은 한 시간을 대기해서라도 한 군데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바로 출발했다. 그렇게 나의 치료/진료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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