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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Sep 02. 2024

영화 <밀양>으로 읽는 파우스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데...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데...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영화 <밀양>을 보셨나요? 작중 이신애(전도연 분)는 아들 준(선정엽 분)을 유괴범(조영진 분)에게 납치당하여 잃습니다. 신애는 황망한 마음으로 종교에 귀의하고, 아들을 잃은 고통을 지우려 처절하게 노력하죠. 이윽고 신애는 어려운 결심을 합니다. 옥중 유괴범을 찾아가 그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괴범을 대면한 신애의 마음은 이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내뱉은 유괴범의 한 마디에 말이죠.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서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망연자실한 신애는 늘어진 어깨로 면회실을 나섭니다. 나의 관용 따위 필요 없다는 유괴범에게 신애의 용서가 낄 자리는 없었던 것입니다. 


과연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신애를 절망으로 이끈 건 유괴범이 주장하는 구원의 근거가 지지리도 박약했던 탓일지 모릅니다. 유괴범의 ‘자기구원’은 신애의 분노로 물든 고통의 세월, 그리고 용서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허망하게 무너뜨렸죠. 이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조건을 고민하게 합니다. 어쩌면 구원이란 마땅한 근거와 자격을 요구하지는 않을까요?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요? 여기서 ‘구원’의 의미는 종교적 차원 너머 우리 모두의 삶과 관계 맺습니다. 위기에 처한 삶을 지옥에 은유한다면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이 곧 구원과 다름없으니 말이죠. 인간의 실존적 위기와 구원에 이르는 길을 궁구하는 오늘의 책,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입니다.



파우스트 제1부

: 어둠을 인식하는 삶


괴테의 노작 『파우스트』는 한 지식인과 악마가 영혼을 담보로 맺은 계약을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중심인물인 파우스트는 우주의 진리를 찾기 위한 열망으로 평생토록 온갖 지식을 섭렵한 고령의 박사이죠. 하지만 갖은 학문에 두루 통달했음에도 파우스트의 마음엔 지우지 못할 허무함이 남았습니다. 그 어떤 지식도 우주의 근원과 본질을 드러내지는 않았던 겁니다. 이런 파우스트를 두고 하나님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흥미로운 내기를 벌입니다. 내용인즉 파우스트가 어떤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의 뜻을 붙들 것인가 하는 것이었죠. 이윽고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다가가 계약을 제안합니다. 계약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현세의 쾌락을 제공하고 파우스트는 그 모든 쾌락을 누립니다. 다만 파우스트가 어느 한 순간의 쾌락에 흡족한 나머지 “멈추어라 순간아, 너 정말 아름답구나!”를 외치면 그 즉시 파우스트의 영혼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소유가 되는 것이죠. 과연 파우스트는 끝내 그의 영혼을 지킬 수 있을까요?


얼마 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이끌고 마녀의 부엌을 찾습니다. 마녀의 영약을 마신 파우스트는 젊고 멋진 청년으로 변모하죠. 젊은 날의 들끓는 욕망과 활력을 되찾은 파우스트는 당당하게 거리를 나섭니다.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여인 그레트헨에게 마음을 빼앗기죠. 그리고 말합니다. “당신의 눈빛과 당신의 말 한마디가 이 세상의 모든 지식보다도 더 소중하고 나를 즐겁게 합니다.” 어찌나 단단히 마음을 빼앗겼는지 그는 평생을 바쳐 탐구한 지식보다 그레트헨이 소중하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둘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사악한 농간으로 그레트헨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약을 먹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파우스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며, 또한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의 친오빠를 살해하죠. 둘의 정욕적인 사랑이 모두를 파멸로 이끈 것입니다. 이윽고 그레트헨은 영아살해범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됩니다. 슬픔에 찬 파우스트는 감옥에 침입하여 그레트헨을 구해내려 하죠. 하지만 웬일인지 그레트헨은 죗값을 치르겠다며 체념하고 기도합니다. “저는 하나님께 몸을 맡겼나이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천사여, 신성한 무리여 나를 에워싸고 지켜주소서.” 그때 하늘에서 별안간 커다란 소리가 들립니다. 이를 들은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만만하게 외치죠. “저 여자는 심판 받았다.” 하지만 잠시 후 하늘에서 더 큰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니다, 그녀는 구원 받았다.” 이로써 『파우스트』의 1부는 그레트헨의 구원을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사실 그레트헨의 구원은 독자들의 의견이 분분한 대목입니다. 그녀는 사랑에 눈이 멀어 온가족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회개를 통해 구원에 이르죠. 이처럼 반성과 자기체념으로 구원에 이르는 그레트헨의 최후는 악한 행위를 저지르고도 뒤늦게 회개만 하면 그만이냐는 비아냥을 자아냅니다. 마찬가지로 영화 <밀양>에서 유괴범을 대면한 신애가 느낀 절망감도 비슷한 지점에서 구원의 불합리함을 꼬집고 있죠. 정말 구원은 그토록 간단한 걸까요? 물론 회개를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점에서 그레트헨의 구원은 다소 부조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만 그녀의 회개는 정신활동으로서의 소극적인 후회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최전선에서 행위로 드러나는 실천적인 참회입니다. 가령 그레트헨은 그녀를 구출하러 온 파우스트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는가 하면, 참혹한 단두대 처형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죠. 이는 그녀의 마음 깊숙이 자리한 ‘죄의식’을 반영하는 적극적 행위이자 실천인 것입니다. 여기서 그레트헨의 죄의식은 구원으로 다가서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죄의식이란 내가 저지른 죄악의 무게를 아는 것, 내 삶이 위기에 처해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밀양>의 유괴범은 때이른 안식을 주장하며, 마땅히 짊어져야 할 죄책감에서 너무 빨리 해방됐습니다. 그의 내면에 한줌의 죄의식이라도 남았다면 섣불리 구원에 이르렀다는 몽매한 착각을 하진 않았을 테죠. 무거운 죄의식을 온전히 짊어진 인간은 처절한 반성과 후회로 괴로워합니다. 또 그러한 인간만이 구원을 갈망하죠. 옥중의 그레트헨은 사무치는 죄의식으로 울며 기도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아버지시여! 절 구원하소서!” 이처럼 구원의 출발은 내 삶이 어둠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는 것, 그리하여 나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삶이 깜깜한 어둠 속에 있음을 깨달은 인간만이 비로소 빛을 소망할 수 있으니 말이죠. 

 

 

 


파우스트 제2부

: 어둠을 극복하는 삶


『파우스트』의 2부는 아름다운 잔디밭에서 몸을 쉬이는 파우스트의 모습을 그리며 시작됩니다. 그레트헨을 잃고 실의에 빠진 파우스트는 요정들의 치유 덕에 상한 마음과 몸을 회복하죠. 얼마 후 정신을 차린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함께 궁전에 입성합니다. 때마침 궁전의 신하들은 국가의 재정 위기를 황제에게 보고하던 중이었죠. 이때 파우스트는 한 가지 묘책을 내어 나라의 재정난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 황제의 신임을 얻습니다. 나아가 황제는 파우스트의 능력에 감탄한 나머지 다소 무리한 부탁을 하죠.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녀 헬레나를 지금 당장 이곳으로 데려오라는 겁니다. 비록 비현실적인 부탁이었지만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에 힘입어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데 성공합니다. 헬레나를 발견한 파우스트는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하죠. 이윽고 사랑에 빠진 파우스트는 헬레나와 결합하여 아들 오이포리온을 낳습니다. 하지만 오이포리온은 때이른 죽음을 맞이하고, 헬레나는 아들을 잃은 충격 탓에 다시 지하세계로 돌아가죠. 


실의에 빠진 파우스트는 다시 황제를 돕는 데 힘을 쏟습니다. 특히나 그는 전쟁에서 눈부신 공을 거두어 황제로부터 광활한 해안지대를 선물 받죠. 파우스트는 하사 받은 땅으로 간척사업을 벌여 비옥한 땅을 일구려 합니다. 이제 그의 남은 꿈은 자유로운 백성들과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었죠. 다만 그에겐 한 가지 불만이 있었습니다. 한 노부부가 사는 오두막이 간척지 전망을 헤친다는 점이었습니다. 불만을 전해들은 메피스토펠레스는 노부부의 오두막과 근처 땅을 깡그리 불태웁니다. 미처 불길을 피하지 못한 노부부는 한줌의 재가 되어 버리죠. 이리하여 파우스트는 원하는 바를 이룬 성취감과 동시에 살생으로 인한 꺼림칙한 마음을 느끼며 복잡한 심정으로 스스로를 자책합니다.


이윽고 어둠이 내려앉은 한밤중 파우스트에게 네 명의 여인이 다가옵니다. 첫째는 결핍, 둘째는 후회, 셋째는 근심, 넷째는 곤궁이었죠. 그 중 근심은 파우스트에게 이제 그만 세속적인 야망을 단념하라고 말하지만 파우스트는 도리어 근심을 꾸짖으며 쉼없이 내달려온 자신의 삶을 예찬합니다. 그러자 근심은 입김을 내불어 파우스트의 눈을 멀게 하죠. 눈이 먼 파우스트는 일꾼들에게 간척지 공사를 독려하며 말합니다.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메피스토펠레스는 승리의 감탄사를 내뱉으며 파우스트의 영혼을 챙기려 합니다. 하지만 그때 하늘로부터 파우스트의 구원을 알리는 신비로운 합창이 울립니다. 파우스트의 구원을 끝으로 『파우스트』의 2부는 막을 내리죠.


이처럼 『파우스트』 2부는 1부와 비교하여 훨씬 방대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가령 1부에서는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의 개인적 체험이나, 혹은 그 밖의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이 주된 내용이었다면, 2부는 본격적으로 국가적 문제, 사회적 이념, 심지어는 지하 세계의 신화까지 다루며 현실과 환상을 아우르는 드넓은 세계관을 건설하죠. 파우스트는 그 광활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폭풍과도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명예를 좇아 지하세계를 드나드는가 하면 사랑을 위해 그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하고, 시민들의 자유로운 삶을 위하노라고 공동체를 건설하는가 하면 꽤나 파괴적인 방법론으로 뭇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죠. 그랬던 파우스트는 대체 무엇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었을까요? 파우스트의 구원의 근거는 대체 무엇일까요? 먼저 주목할 것은 노부부를 죽음으로 내몬 뒤 밤중에 파우스트를 찾은 네 명의 여인입니다. 앞선 1부에서 구원의 첫걸음은 죄의식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죠. 네 여인은 파우스트의 무의식적인 죄책감이 불러온 심리적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파우스트는 이제껏 질풍처럼 내달려온 자신의 삶을 제동하는 죄의식을 무의식으로나마 어렴풋하게 느끼기 시작한 겁니다. 물론 그는 근심을 향하여 꾸짖는 등 자신의 무의식에 깃든 죄책감을 애써 무시하려 합니다. 하지만 일말의 죄책감 속에서 파우스트는 끝내 근심을 떨쳐내지 못하고 맹인이 되어 버립니다. 캄캄한 어둠에 갇힌 파우스트는 이제야 비로소 빛을 소망할 준비를 갖춘 것입니다. 


물론 죄의식만으로 파우스트의 구원을 소명하기란 역부족입니다. 그의 죄의식은 그레트헨의 처참한 뉘우침에 비할 바 없이 가벼웠으니 말이죠. 따라서 파우스트의 구원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선 ‘실존’이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합니다. 이해를 위해 지금 여러분의 손에 들린 볼펜을 예시로 들어보겠습니다. 볼펜의 본질은 종이 위에 글자를 적어내는 것입니다. 만약 펜촉이 닳아 더 이상 잉크가 묻어나지 않는다면 볼펜은 버려집니다. 펜의 본질을 상실했기 때문이죠. 이처럼 본질이란 제작자의 의도가 실제적으로 구현되어 드러난 것입니다. 반면 인간은 볼펜과 달리 제작자가 의도한 본질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가 원하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어떠한 본질로도 규정 지어지지 않으려는 태도 자체가 곧 실존이라는 삶의 방식인 셈이죠. 그런 의미에서 파우스트는 지극히 실존적인 인간입니다. 젊은 날엔 사랑을 좇아 숱한 위험을 무릅썼고, 공명심을 불태워 국가의 부흥에 이바지했으며, 훗날엔 자유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사회적인 실천에 앞장섰죠. 그는 삶의 매순간마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함으로써 오롯이 한 인간으로 실존하기 위한 고군분투를 벌인 겁니다. 말하자면 파우스트가 얻은 구원의 근거는 본질이라는 어두컴컴한 감옥에 갇히지 않으려는 실존적인 노력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레트헨이 어둠을 인식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렀다면, 파우스트는 어둠을 극복함으로써 구원에 다다른 것이죠.





앞서 영화 <밀양>을 소개해드렸습니다. 밀양(密陽)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하죠. 하나는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빛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은밀하게 숨겨진 빛을 뜻합니다. 현실이 캄캄할 때 빛은 구원의 은유입니다. 이때 우리 모두를 빈틈없이 내리쬐는 빛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구원의 동등한 기회를 의미하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갈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쁜 삶을 그저 살아 내기조차 버거운 이들에게 구원은 비밀스럽게 제 모습을 감추고 말죠. 요컨대 빛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누구나 빛을 좇아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위기 속에서 인간을 건져내는 게 실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어떨까요?


처음 파우스트 앞에 모습을 드러낸 메피스토펠레스는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만들어 내는 힘의 일부이지요.” 그의 자기소개는 도덕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숙제를 내줍니다. 혹시 악이란 그저 선의 훼방꾼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으시나요? 만일 그러하다면 도덕의 지상 과제는 세상 모든 악을 척결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파우스트』가 말하는 도덕이란 그렇지 않습니다. 『파우스트』에 따르면 진정한 도덕성은 악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선을 선택하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 실현됩니다. 작품을 살펴보면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기 이전까지 파우스트의 삶은 그 누구보다도 사변적이었습니다. 그는 경험이 아닌 이성으로만 지식을 탐구하고 진리를 좇는 고집 센 학자였죠. 물론 그가 동경한 지식은 겉보기에 완전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결함이 없는 순전한 지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나아가 악의 없이 빛을 뿜어내는 선한 지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작품 어디를 살펴보더라도 파우스트가 지식으로 구원에 이르렀다는 말이 나오던가요? 파우스트를 구원으로 이끈 건 숭고한 선이 아닙니다. 파우스트를 구원으로 이끈 건 악과 다투며 벌인 그의 행동입니다. 속절없는 방황과 혼란 속에서도 끝내 스스로를 지켜내려는 그의 실존적인 행동입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악이 부재한 진공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악의 충동질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올바른 길로 가고자 하는 노력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요? 흑암으로 물든 밤하늘에 더욱 빛나는 별처럼, 우리네 삶도 어둠을 무찌르는 노력 속에서 보다 반짝이는 게 아닐까요?


작중 파우스트가 홀로 서재에 앉아 성경 말씀을 곱씹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는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느니라”라는 구절을 읽으며 ‘로고스’를 ‘말씀’으로 번역해보기도 하고, 다음엔 ‘뜻’으로, 그 다음엔 ‘힘’으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번역이 만족스럽지 않던 파우스트는 끝내 ‘행위’로 번역하고는 그제서야 흡족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는 파우스트가 ‘행동하는 인간’임을 단적으로 드러내죠. 물론 여기서 ‘행동’이란 앞서 소개한 실존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규정한 본질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고 부딪히며, 또 좌절하고 극복해 나가는 실존 말이죠. 그러니 우리 내면의 메피스토펠레스가 이제 그만 타협하라고, 현실에 머무르라고, 그만하면 충분하다며 충동질을 할 때면 파우스트를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 안의 악은 아직 악이 아니며, 방황하고 있다면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말이죠.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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