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무너진 담벼락을 본다.
내 마음 같아 한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아 발걸음을 돌렸다. 문득, 담벼락을 이루고 있는 벽돌들이 단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단어, 수식어 또는 목적어나 관형어. 이들의 선택 혹은 배열이 그르치면 문장은 어긋나고 만다. 무너진 담벼락이 말하고 있었다. 이게 너의 글이라고.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나를 쓴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을 활자로 옮기는 것이다. 누군가는 말하듯이 쓴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말하는 것과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고도 한다. 다들 자기만의 방식, 취향, 스타일이 있을 것이다. 글을 쓰기 이전에 먼저 생각을 정리한다. 가급적 예쁘고 아름다운 돌멩이를 골라 내놓고 싶다. 그래서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잘 살아야 한다고들 하나 보다.
글을 쓰며 나를 되돌아본다.
솔직함이 미덕인 줄 알고 오만하게 굴었던 기억은 부끄러움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책을 읽을수록 좋은 문장을 알아보는 안목이 생길수록, 내 글이 형편없다는 사실과 나의 과오가 부메랑처럼 날아든다. 독서는 취향만 가려내주는 것이 아니다. 나를 마주 보게 한다. 고미숙 선생은 자신의 저서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에서 ‘모든 책 속에 자기 자신이 있다’라고 했다. 이 문장을 만난 뒤로 읽는 책마다 내가 외면한 나를 만난다. 그때의 서늘함이란 집안 어딘가에서 갑자기 바퀴벌레를 발견할 때의 송연함과 같다.
내 글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오래도록 나를 괴롭힌다. 글을 쓰며 성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물론 좋은 사람인 척할 수는 있겠다. 글은 얼마든지 자신을 포장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니까. 성찰이 수반되지 않은 글쓰기는 비닐포장지와 같다. 얇고 요란하게 바스락대며 벗기기도 쉽다. 적당히 모든 것을 통달하고 초월한 것처럼 흉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와 타협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알면서도 실수하고, 투박하며 서툴다. 이런 나를 서술할수록 스스로를 외면하고 싶다. 그러나 부족하고 못난 나를 인정해야 한다. 내가 쓰는 글에는 내가 포함되어야 하고, 나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속이 깊은 항아리는 많이 담아내고 숙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읽기와 쓰기로 그 깊음을 만들어내고 싶다. 이것이 욕심인지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믿음이었으면 좋겠다.
정돈된 마음으로 취향의 벽돌을 고르고 나열한다. 어떤 벽돌이 나다운 것일까?
다시 벽돌을 쌓는다. 개중에는 색깔이 바랜 벽돌도 있을 것이고, 모서리가 부서져 나간 녀석도 있을 것이다. 사이사이 시멘트를 발라 메꾼다. 틈은 정교하게 아래부터 단단하게 쌓아 올리는 것이다. 이 담벼락은 견고하게 나를 지켜줄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언젠가는 더 많은 것들을 자유롭게 쓸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