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 시작에 머무는 힘
가끔 sns에 보이는 웃지 못할 실화들이 있다.
'우천시'는 어디인가요? 중국인가요?
'사건의 시발점' 왜 욕을 하죠
'심심한 사과' 라니요?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나도 정말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서 웃어넘겼다.
교육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46만 명은 초1 수준의 문해력을 지녔단다. 그래서일까? 서점에 가면 문해력 관련 책들이 넘쳐나고, 엄마들은 내 아이가 혹여 '문해력' 떨어지는 모지리가 되진 않을까 책을 산다. (정작 자신은 읽지 않는다.)
요즘 "문해력"이라는 단어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만능열쇠처럼 다루어진다. 학교에서는 문해력이 미래를 좌우한다고 가르치고, 자기계발서는 문해력이 성공을 가져다준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문해력은 정말 그런 힘을 가진 걸까? 때때로 나는 묻는다.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문장일까, 아니면 삶일까?
사전적 정의는 간단하다.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맥락까지 읽어내는 능력이 문해력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능을 너무 쉽게 과장한다. 마치 문해력을 갖추면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까지 절로 여무는 것처럼.
실제로 요즘 학생들은 시험 문제의 지문을 빠르게 해석하고 요점을 짚어내는 데 능숙하다. 그러나 교우관계는 어떨까? 텍스트 바깥에 있는 미묘한 감정, 혹은 암묵적 맥락을 읽어내지 못한다. 이게 어디 교실에서만의 문제일까. 사회에도 넌씨눈들은 넘쳐난다.
문해력은 사고를 돕는 하나의 도구일 뿐, 깊이 있는 사유나 인간의 성숙 자체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이해한다고 해서 반드시 수용하고 성찰하는 것도 아니다. (독서량을 자랑하지만 확증편향으로 범벅된 사람을 난 많이 봤다.)
'문해력 신화'는 시장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문해력이 이토록 절대적인 가치처럼 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문해력은 수치화할 수 있고, 교육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상품화'가 가능하다.
"30일 만에 문해력 완성", "문해력이 곧 경쟁력이다" 같은 문구는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하며 끌어당김의 법칙을 발휘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인간 성장의 과정을, 간단한 기술 습득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환상은 너무나 달콤하니까.
하지만 우리의 삶은 시험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내면은 문제집처럼 요연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읽을 수는 있어도, 살아낼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넘친다.
글은 끝맺을 수 있지만, 삶은 늘 계속된다
삶은 책 보다 복잡하고, 말보다 어긋나 있으며, 이론보다 흔들린다. 누군가 "괜찮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속의 떨림을 읽어야 한다. 누군가 웃을 때, 그 웃음 속에 감춰진 긴장을 혹은 삼켰을지 모르는 눈물을 감지해야 한다. 텍스트가 제공하는 것은 표면일 뿐이며 그것은 늘 피상적이다.
문해력만으로는 타인의 고통을 알아챌 수 없다.
문해력만으로는 세상의 모순을 견딜 수 없다.
문해력만으로는,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감정과 사유의 깊이, 애매함을 견디는 인내, 그리고 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인간의 생을 읽는 마음이란 이런 게 아닐까.
문해력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하다. 진짜 여정은, 읽는 것을 넘어 살아내고 질문하며, 때로는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고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는 데 있다. 문해력 너머를 향해 걸어가는 인간은 언젠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