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
일본 야마구치를 여행하던 시기는 3월이었다. 봄이지만 아직 쌀쌀한 바람이 바닷가 절벽을 따라 길게 흘러가던 시기였다. 규슈와 주고쿠를 잇는 곳에 위치한 야마구치는 내게 '절벽과 해안'으로 기억되는 여행지다.
이곳의 명소 모토노스미 이나리 신사는 그 절벽과 해안을 극적으로 품고 있다. 붉게 칠해진 도리이 123개가 해안선을 따라 굽이치며 이어지고, 그 아래에는 파도가 하얀 거품을 부서뜨리며 끊임없이 밀려온다. 이곳은 신을 모시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바다와 땅, 인간이 오래도록 맺어온 관계와 믿음이 눈앞에 펼쳐지는 장소였다.
야마구치의 인상 깊은 문화는 여우(기츠네)를 신의 사자(使者)로 섬기는 지역 신앙이다. 일본의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흰 여우는 다산과 번영의 상징물로 일본인들에게는 숭배의 대상이다. 일본의 이나리 신앙은 농경사회에서 시작해 풍요, 사업 번성,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민속 신앙이다. 여우는 교활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 현실을 잇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신사 곳곳에 여우 조각이나 그림, 부적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헌금함이 신사 건물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어, 참배객이 동전을 던져 넣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동전 던지기 자체가 “소망을 하늘에 올린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현지 안내문에서는 설명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즐거움으로, 현지인들은 진지함으로 이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이 지역 공동체가 신앙을 자연의 일부처럼 받아들이는 태도는 꽤 인상 깊었다. 신사는 절벽 끝에 위치해 바람이 강하게 부는데도, 관리 상태가 깨끗했다.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도리이는 강한 바닷바람에도 자주 덧칠하는지 색이 바래지 않고 선명한 붉은색을 유지하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이 매일 도리이를 닦고 잡초를 뽑는다고 했다. 신앙이 특별한 의식이나 맹목적인 믿음만을 의미하지 않고, 공간을 지켜내는 꾸준한 마음과 태도로 유지된다는 점이 새삼 와닿았다. 어쩌면 태도가 믿음을 지탱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신앙이든 공동체를 묶는 이야기의 힘을 가지고 있다.
여우를 신의 사자로 상징화한 것은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해석해 온 방식이다. 바다의 거친 파도, 고립된 지형, 농업과 어업이 공존하는 생활 속에서 ‘안내자’로서의 여우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전통을 지켜내는 어려움은 있다. 바닷가에 위치한 붉은 도리이의 절경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지만, 좁은 도로와 주차공간, 바람이 강한 절벽에서의 안전 문제 등은 여전히 개선해야 할 문제점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이 풍경을 사랑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신사를 돌보고 있었다.
여우가 길을 안내하는 신사의 풍경을 뒤로하고 나오면서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 바다와 강한 바람, 그 풍경을 모두 껴안겠다는 듯한 붉은 도리이의 행렬을 눈에 담았다. 여행이란, 내가 사는 세계를 벗어나 다른 이들의 믿음과 삶의 방식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존중하는 일이다.
여행과 삶은 그래서 닮았다. 그 어떤 삶이라도 존중받아야 마땅한 경이로움이 있다. 이 간단한 진리를 잊지 말자고 지금 이 글을 쓰며 다시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