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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를담다 Jun 30. 2022

서울탱고

방실이/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하면서.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도 묻지 마세요.

이리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고향도 묻지 마세요.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란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우울한 감정이 끊임없이 치솟던 날.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는 것조차도 내가 그들의 평가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닌가 하며 마음을 졸이던 그때.

내 존재에 대해 다시금 질문을 던지고 좌절하고 답을 찾던 그때 이 노래를 만났다.

태어날 때부터 자라온 이곳에서 내 이름 석자와 함께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나의 과거, 가족, 재산, 성격, 학벌, 친구관계, 겉모습... 한집 건너 한집은 아는 사람이라 이름 석자만 들으면 '나 그 애 아는데'라고 쉽게 판단해버리는 사람들 속에서 중심도 없이 살아가다 보니 깨지고 치이고 부서질 일들이 참 많았다. 가난 때문에 생긴 열등감 때문인지 '쟤네 집 부자야'라는 말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위축이 되기도 했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일에 타당한 이유도 없이 주눅부터 드는 내 모습이 미웠다.


누군가의 한마디에 때론 작은 행동 하나에도 상처를 받고 그 속의 담긴 의미를 상상하며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는 언어의 수들이 늘어났다. 우리 엄마 아빠는 왜 가난했을까. 왜 배움이 짧아서 나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을까. 왜 이런 환경에서 나를 키웠을까. 제대로 키워주지도 못할 거면서 왜 애를 셋이나 낳았을까.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 가끔씩 했던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다시 반복되었다. 모든 건 한때라는 사실을 까맣게도 모른 채 지금 마주한 불안한 감정이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행복과 불행이 오직 이 상황에만 달려 있었던 듯했다.


당장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이 이 없이 이어졌고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을 때마다 sns를 뒤져가며 내가 처한 현실을 가늠해 보았다. 우리 집보다 훨씬 크고 깨끗한 집, 나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곳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최상의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듯한 친구들. 그 뒤를 숨 가쁘게 쫓아가다 보면 나는 늘 초라한 패자로 끝이 나 있었다. 중심도 없이 내 인생의 답을 타인을 기준으로 두고 살았으니 감당 못할 크기로 들어생각들 때문에 머릿속과 육체가 고단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너한테 십만 원이 있고 나한테 백만 원이 있어, 그러면 상당히 너는 내가 부럽겠지 짜증 나겠지.

근데 입장을 한번 바꿔서 우리가 생각을 해보자고, 나는 과연 니 덕분에 행복할까.

내가 더 많이 가져서 만족할까, 아니지 세상에는 천만 원을 가진 놈도 있지.

난 그놈을 부러워하는 거야. 짜증 나는 거야. 누가 더 짜증 날까. 널까. 날까. 몰라 나는(...)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장기하/부럽지가 않어>


 나름의 마음공부를 하다 보니 잘(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삶을 코앞에서 들여다보며 비교를 하면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달았.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삶들은 당장 돈이 없어도 카드나 빚으로도 가능한 삶이었고, 행복은 개인만의 영역이니 누구도 평가 내릴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을. 그들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었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경쟁사회가 낳은 심리적 불안감을 통해 나와 내 주변 사람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따스하고 애절하게 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부부를 통해 태어난 두 아이들 덕분에 경쟁만으로 얼룩진 내 삶을 다른 방향에서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법정스님 말씀이 생각이 났다.

' 아무개네 집은 아무개집 방식대로 살면 되는 거예요. 왜 남들하고 비교를 합니까. 100만 원 벌면 100만 원에 맞게 살면 되는 거지. 그 집은 그 집대로 우리 집은 우리 집 대로 사세요'

그동안 다른 모양 다른 크기 다른 색깔 다른 무게의 삶들을 나와 비교하며 아주 어렵고 복잡하게 살다 보니 작은 일에도 예민해져 날카로웠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과거를 가져다 먼 미래만을 꿈꾸던 어리석은 시간들이 떠올랐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니 다른 가족들도 행복할리 없었다.


이런 생각들에 이르자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외부에 사용하던 에너지를 내부로 돌리는 시간들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내 행동과 말투 그리고 오랫동안 굳어졌던 생각들을 꺼내어 재점검하며 다듬어 나갔다. 당장 눈에 띄게 좋아 지진 않았지만 마주하는 상황들이 예전처럼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는 듯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 주변의 공기마저 맑아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부터라도 내 부모님이 어떤 삶을 살았든 간에  과거의 내상황과 지금의 나는 더 이상 연관시킬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모든 건 내 마음에 달렸다'는 말이 진심으로 내게 다가왔다. 지금의 이 시간의 내 모습. 오늘을 살아나가는 나의 마음가짐이 과거보다 미래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망각의 동물인 나는 이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꾸준히 사색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제 내 이름을 묻고, 내 나이를 묻고, 내 사는 곳을 묻고, 내 직업을 묻고, 내 취미를 묻는 사람들에게 굳이 세세하게 답을 해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조차도 상대에게 똑같은 질문은 접어두고 지금 이 상황 속에 있는 오직 '너' 오직 '나'만을 바라보며 그 어떤 판단과 분별을 내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타인의 평가에 좌지우지되는 삶이 아닌 그 누구와도 수평적인 관계유지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정해진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하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내가 알던 타인도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나처럼 그 어떤 사건을 계기로, 혹은 밤새 또 다른 깨달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과 만나는 순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 마주한 오늘은 나와 타인이 새롭게 만나날이고, 지금 이 순간도 전과 같을 수 없는 만남이다. 나도. 너도. 어제의 우리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서의 우리를 만나야 한다.


나는 포장지로 이쁘게 포장했던 과대망상 속에 빠져 있던 자신의 포장지를 벗겨내고 자유로움을 위해 지금 있는 내 모습 그대로를 표현하는 나를 만나기로 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습관을 내려놓고 요즘 내가 정한 기준들을 실천해 나가기로 했다


'모든 사람을 진심을 다해 대할 것'

'내가 받았을 때 기분 나쁠 만한 일과 말은 하지 않을 것'

'모든 건 그때 가서 생각할 것'

'되도록이면 내가 많이 베풀 것'

'나를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과는 거리를 둘 것'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질 것'

'책을 많이 읽을 것'

'모든 상황을 감정적이 아닌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것'




스스로 세운 기준들이 조금씩 익숙해질 즈음 나는 전보다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게 무척이나 부드럽고,  가벼워짐을 느끼고 있다. 눈을 마주치고 진심을 다해서 마주하는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그렇게 어렵던 선생님도 어렵지 않게 되었고, 아무리 나이가 많으신 분들도 혹은 나이가 어린 동생들에 게도 전보다 편하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진심으로 그분들 대했더 그분들도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셨다. 간혹 그러지 못한 분이 계셨을 때에는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분은 아마 나에게만 그러는 것이 아닐 테니까. (나에게만 그런다고 하면 속상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조차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남이 나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자유롭게 살 수 없지.

 <미움받을용기/기시미이치로/인플루앤셜>


요즘 나는 '마음의 평안'에 대해 신경을 쓰는 편이다. 자고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이 불편한지 잘 들여다본다. 상황에 떠밀려 혹은 나를 증명하기 위해 내 몸을 혹사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나만의 아집과 강박으로 타인과 나를 옭아매고 있지는 않는지. 나쁜 에너지를 주변에 퍼트려 함께 그 소용돌이 속에 말려있지는 않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하지 못할 일인지를 꾸준히 물어가며 내면의 나를 점검해 나가고 있다.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난다면 혹시 잠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며 쉬어 가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말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더 생각해보기도 한다. 일부러라도 좋은 글을 읽고 좋은 말을 듣고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며 다듬어 좋은 에너지 파장을 주변에 고루 나누어주는 것이 나의 몫의 베풂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누가 정해놓은지도 모르는 규칙과 규정에 얽매이는 것을 줄여 나가며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지금 내 인생에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 '내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를 스스로에게  물어가며 삶의 의미를 잊지 않고 산다면, 조금 헤매고 깨지고 잃어도 다시 딛고 일어날 힘이 생길 것만 같다.


우리들 모두 남 눈치를 그렇게 볼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내가 내 삶을 사는 건데, 더 이상 내 삶을 책임져주지 않을 사람들 말에 휘둘리고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내 경험상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사느라 바쁜 사람들은 남의 인생 왈가왈부할 시간이 없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불안한 자기 인생이 그럴싸해 보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가져다가 휘두르는 거지.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말은 되도록이면 신경 쓰지 자. '너 참 불쌍하다' 하면서. (내가 해명한다고 들을 사람이 내 욕을 하겠나)


우리는 모두 각자 자기만의 그릇으로 살면 되지 않을까? 언론과 사회의 부추김 속에 홀딱 속아 '태어난 김에 대단하고 멋진 일 하나쯤은 하고 가야 하지 않나'라는 이런 쓰잘 때기 없는 생각일랑 집어치우고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따스한 말이나 한마디 건네보자. ('고생 많으시네요'라고) 알고 보면 이런 말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도는 내 거창한 계획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작은 것을 소홀히 하고 허황된 꿈만으로 혼자만의 세상에서 멋진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참. 참고로 내가 알고 있는 엄청난 비밀 한 가지를 살짝 알려주자면,


'사실. 내가 없어도 네가 없어도 이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

 

뭐 어렵고 복잡하게 살 거 있나. 부질없는 인생사, 내 모습 그대로 그냥 쉬었다 가자.

좋아하는 술이나 한잔하면서.



자아의 이미지에 매어 있지 않을 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조건, 소유, 지위를 다 떼어 내도

우리의 본래 존재는 호수만큼 투명하고 바다만큼 역동적이다

<인생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이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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