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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더 잘 쓰게 된다 06

매력이 뭔지 확실하게 가르쳐 주겠다.

by 이기원

“주인공 캐릭터에 매력이 없네요.”


내가 예전에 프로듀서들에게 자주 듣던 말이다(부끄럽지만 요즘도 듣는다). 이 말은 항상 '네 작품은 재미없어'와 동의어로 들린다. 얼굴이 빨개지고 어디 쥐구멍에 숨고 싶어진다.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그렇군요... 근데 캐릭터의 매력이란 게 뭔가요?”


그럴 때마다 나는 되물었다. 첨엔 정말 몰라서 물었는데, 프로듀서들이 나처럼 당황하는 것을 보고, 그 다음부터는 복수심으로 물었다. 근데 솔직히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만든 캐릭터에 매력이 없다고 하면, 정말 묻고 싶지 않은가? 매력이 대체 뭐냐고.


문제는 프로듀서도 매력이 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작가님, 저를 능멸하시는 건가요?”


아니, 몰라서 물었는데, 능멸한다니. 그건 역으로 보면, 지가 나를 능멸한 거 아닌가? 지도 모르면서 뭘 그렇게 아는 척하고 그러냐고.


실제 있었던 일이다(아마 당신에게도).


어쨌든 하도 그런 얘기를 듣다 보니까 ‘매력의 실체’를 한 번은 제대로 파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있는 수많은 작법 책들을 뒤졌지만 매력에 대해 말해주는 책은 없었다(혹시 매력에 대한 설명이 있는 작법 책 보신 분 제보 바랍니다).


이번엔 ‘매력’이란 단어가 제목에 들어간 책들을 구입했다. 의외로 실용서에서 작법에 적용할 핵심을 얻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내 경우에는 선거 전략 책이나 마케팅 책에서 작법에 대한 인사이트를 꽤 얻은 경험이 있다).


미치는 줄 알았다. 왜? 없었으니까.


매력을 소재로 책 한 권을 할애한 책들에서도 내가 찾아 헤매고 있는 매력에 대한 통찰이 없다는 것은 사실 충격이었다. 그런 책들은 대개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피겨 스케이터 김연아는 이런이런 마음씨를 가지고 있고, 이런 행동들을 했고, 이런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나는 울고 싶었다. 대체 매력의 실체가 뭐냐고?


자칭 매력 전문가, 매력 전도사라는 분들이 내린 매력의 정의는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여러분, 매력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랄 염병. 하나마나한 소리다.


매력이 뭔지 몰라 좌절한 나는 삐뚤어졌다. 그래서 내가 창조한 캐릭터를 씹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대체 매력이 뭐냐고 불량스럽게 물었던 것이다. 그들을 능멸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매력은 동경할 만한 요소를 가진 인물이 나와 비슷한 사람임을 깨닫게 될 때 생깁니다.”


나와 작업을 했던 감독이 내게 말했다.


심봤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그가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누구한테 들었는지, 아니면 혼자 터득했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어느 책에서도 알려주지 않았고, 매력에 관한 책을 낸 매력 전문가와 매력 전도사도 정의하지 못했던 '매력의 실체'를 드디어 알게 된 것이었다.


이후, 나는 매력에 관해 연구해 발표한 국내 어느 논문에서도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 뒤 나는 매력의 정의를 공식으로 만들었다.


매력 = 동경심 + 동질감


즉, 매력은 캐릭터에 대한 동경심과 동질감이 동시에 느껴질 때 생기는 것이다.


아직은 감이 잘 오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얼굴 천재 차은우가 커피숍에 들어와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하고는 멋진 자세로 테이블에 팔을 기대고 뭐가 즐거운지 콧노래를 부른다. 그냥 화보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은혜롭다. 이윽고 커피가 나오자 눈을 감고 향을 깊게 음미한 다음 ‘잘 마실게요’하곤 윙크까지 날리며 커피숍을 나간다. 그러면 카페 아르바이트생,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는다.


만약, 당신이 이런 장면을 보고 ‘매력이 철철 넘친다’고 생각한 다면, 당신의 작가적 미래는 그리 밝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질감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것이다. 그저 잘생김이라는 동경적 요소 밖에 없는 것이다.


동경심은 어떤 인물을 보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거나 '저런 능력을 갖고 싶다'라고 품는 마음이다. 캐릭터의 신념, 용기, 실력, 헌신 같은 인격적인 면에서 천재성, 유머 감각, 뛰어난 실력 같은 능력적인 면은 물론이고, 외모, 재산, 명성, 신분, 권력 같은 외적 조건까지도 포함한다.


하지만 매력의 핵심은 동경심이 아니라 동질감이다.


동질감은 나만 할 것 같은 것을 그 사람도 하는구나 생각될 때 가장 강력한 효과를 낸다.


자, 그럼, 위의 이야기에서 동질감을 사용해서 캐릭터의 매력을 한 번 만들어 보자.


... 이윽고, 커피가 나오자 눈을 감고 향을 깊게 음미한 차은우는 ‘잘 마실게요’하곤 커피숍을 나가다가 그는 ‘아차!’하고는 카운터로 돌아온다. 카페 아르바이트생, 왠지 긴장된 모습이고. 카운터에 커피를 내려놓은 그는, 지갑에서 쿠폰을 꺼낸다.


"스탬프를 안 받아갈 뻔했네요."


남자가 선한 미소를 짓고, 카페 아르바이트생 역시 미소를 짓는다.


이때 당신은 아, 나도 쿠폰에 스탬프를 받는데, 저 잘 생긴 차은우도 그러네. 와, 매력 쩔어! 이렇게 느끼는 것이다.


두 유 언더스탠?


이젠 실제 작품인 <별에서 온 그대>에서 여주인공인 천송이가 어떤 때 매력적인지 찾아보자.


우선 동경할 만한 요소. 이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하고 아름다운 탑스타이다. 그런 천송이가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은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든 풀려고 한다. 과연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까?


그녀는 패리스 힐튼 같은 돈 많은 셀럽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스트레스를 풀 때 백화점 명품관에 가서 싹쓸이 쇼핑을 하거나, 강남의 고급 클럽에 가서 비싼 술을 진탕 먹고 골든벨까지 울릴 거라 생각한다. 아니면, 비행기 1등석을 타고 유럽 어느 나라로 휙 날아가던가.


하지만 천송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시청률이 떨어질 것을 아니까.


천송이는 열받는 상황에서 어렸을 때 자주 가던 만화방에 가서 낄낄거리고 때론 찔찔 짜며 만화를 본다. 그게 그녀가 스트레스를 푸는 법이다. 거기에 라면과 소주는 덤. 시청자의 상당수가 그렇게 하는, 또한 그렇게 할 법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매력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힘’인데, 이런 식으로 표현된 매력이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끝까지 작품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매력에서는 동경심보다 동질감이 더 중요하다. 동질감이 기준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자기보다 얼마나 더 멋지고 훌륭한 사람인가를 판단한다.


따라서 실력 있는 작가들은 캐릭터의 동경심보다는 동질감에 방점을 둔 묘사를 한다.


미드 <더 클로저>를 보자.


이 드라마는 LA 경찰청 특수팀의 책임자인 브렌다가 거친 남자들이 득시글한 경찰청 내에서 실력도 실력이지만,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각종 어려운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수사물이다. 미모와 실력에다 강단까지 갖춘 경찰청의 수사 책임자라는 설정은 동경할 만한 요소로서는 거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 클로저>는 브렌다라는 캐릭터에서 시청자들과의 동질적 요소를 어떻게 설정했을까? 그것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듯한 ‘단 것에의 유혹’이었다(이 시리즈의 크리에이터는 정말 고수임에 틀림없다).


브렌다는 스트레스에 노출된 보통의 직장인들처럼 늘 단 것이 땡기는 여자이다. 책상 서랍을 열면, 그 안에는 초콜릿, 쿠키, 그리고 도넛 같은 것들이 항상 들어있다. 먹을까 말까, 그녀는 수시로 서랍을 열었다 닫는다(나는 냉장고 문을 수시로 열었다 닫았다 한다).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그 브렌다의 심정을 시청자들은 잘 안다. 그러면서 그 캐릭터의 매력에 빠져든다. 왜? 내 서랍(마음의 서랍도 포함)에도 단 것들이 들어 있거든.


그런 브렌다가 어려운 사건을 끝내고 퇴근 준비를 하다가 뭔가 허전함을 느낀다. 왜 허전할까, 그러면서 문득 서랍을 연다. 그 안에 들어있는 먹음직스러운 도넛... 브렌다는 미소를 지으며 도넛을 자신에게 주는 선물인양 한 입 베어 물고는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바로 이런 브렌다의 매력이 드라마를 시즌 7까지 만들어진 원동력이라고 본다(이 드라마 때문에 살찐 사람 많다고 한다).


이젠 심화과정에 들어가 보자.


미국과 일본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한 <굿 닥터>의 주인공 박시온의 매력을 살펴보자.


주인공 박시온은 천재 의사라는 동경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동질감은? 사실 그는 자폐아로서 드라마를 보는 보통사람들에게 동질감을 유발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박시온은 매력이 없는 캐릭터일까? 아니다. 박시온은 매력의 최상위 레벨인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이다.


사실 동질감은 시청자들과 감정적 유대를 위한 장치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하게 감정적 유대를 할 수 있는 것은 동질감보다는 동정심이다. 연민 즉, 남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겨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우리는 드라마를 보면서 박시온이 정말 잘 되길 빌었다.


즉, 이것을 공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치명적 매력 =동경심+동정심


당신은 공식 하나를 더 건졌다.


미드 <하우스 M.D>의 주인공 닥터 하우스 역시 의학에 천재이다. 하지만 성격이 괴팍하고 지랄 맞다. 그런데도 닥터 하우스는 치명적인 매력의 캐릭터이다. 왜냐하면, 그는 잘라야 되는 다리를 자르지 않아서 영구적인 통증을 안고 사는 환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아프면 짜증이 나는데, 닥터 하우스는 오죽하겠나. 그는 그런 몹쓸 통증을 안고 살면서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살려낸다. 그러다 보니 그가 내뱉는 각종 비호감적 발언들이 유머와 애교로 들린다.


바로 치명적인 매력의 힘이다.


미드 <퀸즈 갬빗>의 혼외자인 엘리자베스는 엄마가 자살하는데 함께 자살당할 상황(?)에서 극적으로 생존해서 고아원에 맡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길, 인간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인간에게 감정이입을 한다고 했다.


누구나 살아오면서 부당한 대우를 안 받아본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그런 경우에 처한 인간을 보면 동병상련을 느끼면서 연민을 느끼고 동정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자베스는 엄청나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고, 그로 인해 보는 사람과 연민과 동정을 통한 ‘감정적 유대’를 탄탄하게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엘리자베스가 체스 천재였다니! 매력이 치명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악역이나 빌런도 이런 매력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있지, 왜 없겠는가?


폭력이나 금단의 것을 행하는 것도 보통 사람들이 쉽게 행할 수 없는 동경의 요소이다.


다만 그 악당이 매력적이려면, 그에게도 감정적 유대를 할 수 있는 동질적 요소나 동정적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영화 <조커>를 보자.


<조커>가 명작인 이유를 캐릭터의 매력적 측면에서 보면, 영화 전체가 주인공 아서를 연민과 동정하게 만드는 에피소드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동경할 만한 요소는 나쁜 짓도 포함되므로, 이유야 어찌 됐든 어머니를 살해한 아서는 악에 대한 동경적 요소를 충족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는 처음엔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 병든 노모를 모시고 살고, 그녀와 함께 티브이 쇼를 보는 것을 즐기는 소시민이었다. 광대 분장을 하고 피켓맨을 할 때 아이들이 피켓을 빼앗고 두들겨 패도 화조차 못 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웃음이 한 번 터지면 멈추지 못하는 특이한 병을 갖고 있었으며, 우울증 환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도 꿈은 있었으니, 멋진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재능마저 없었다. 연민+동정+연민+동정...


이렇게 영화는 조커가 매력적인 빌런이 되도록 치밀하게 연민을 자아내도록 했고, 동정을 유발하게 해서 감정적 유대 내지는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이제 매력의 실체를 알게 되었는가?


그럼, 묻겠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기원이란 인간은 캐릭터적으로 볼 때 매력적인가?


우선 동경할 만한 요소.


글도 잘 쓰고, 작품에 대한 분석도 뛰어나며, 드라마에 대한 통찰도 있다(인정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 게다가 은근 유머감각도 있다.


다음은 동질적인 요소.


일단, 이번 글 맨 앞에 피디들로부터 캐릭터에 매력이 없다는 얘기를 예전에 많이 들었다고 하곤, 부끄럽지만 요즘도 듣는고 고백한 대목, 그 부분에서 속으로 피식하고 웃었다면 내게 매력을 느낀 것이다. 당신만 그럴 줄 알았는데, 동질적 요소를 가진 사람을 발견한 것 아닌가. 와, 저 인간도 나랑 똑같이 까이는구나.


그리고 이런 작법 글을 쓰는 사람들은 뭔가 엄숙주의에 사로잡혀서 겸손한 꼰대처럼 얘기하는데, 나는 적당히 자뻑도 해가면서 약간은 양아치처럼 얘기한다. 마치 당신이 친구와 얘기할 때처럼 말이다. 당신이 동질감이 느끼지 않을 재간이 없다. 어떤가? 나란 인간 매력적이지 않은가? 뭐, 아님 말고.


'매력'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혹시, '코리안 좀비' 정찬성이 미국의 맥스 할러웨이와 했던 UFC 은퇴 경기를 본 적이 있는가?


정찬성은 경기장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저돌적으로 공격에 임한다고 해서 '코리안 좀비'라는 별명을 얻은 파이터이다.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나는 정찬성처럼 화끈하게 경기를 하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세월은 무쇠도 녹인다고, 정찬성 역시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정찬성은 시종 맥스에게 밀렸고, 2회전에서는 거의 질 뻔하면서 체력을 다 소진했다. 정찬성이 이기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다른 선수라면 3라운드에 가서는 슬금슬금 꼬리를 빼거나, 전략을 수정해서 나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찬성은 3라운드 공이 울리자 더욱 공격적으로 나섰고, 결국 맥스의 한 방에 그대로 녹다운 돼 버렸다.


"나는 챔피언이 목표인 사람이다. 할러웨이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했다. 난 3등을 하려고 격투기를 한 게 아니다. 톱랭커를 이기지 못했으니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은퇴선언. 정찬성은 말도 참 멋들어지게 한다. 그는 진짜 할러웨이를 이기려고 최선을 다했다.


"정찬성은 레전드이다. 죽거나 죽이거나였던 싸움에서 내가 살아남은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좀비의 마지막 상대였다는 게 영광스럽다."


정찬성이 주인공이라면, 빌런인 맥스 할러웨이도 멋진 말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좀비는 방패로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검으로 싸우는 사람이다. 오늘 마지막까지 그는 검을 들었고, 그것이 팬들과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다. 나는 좀비처럼 은퇴하고 기억되고 싶다. 기록이나 숫자로 기억되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좀비처럼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맥스 할러웨이가 정찬성에게 동경심을 드러냈다.


정찬성의 멋짐은 격투기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상대에게 맞을수록 더 들이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항상 상대에게 존중을 표하고, 졌을 때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상대를 추켜 세운다. 때문에 그에게는 수많은 팬들이 있는 것이고, 맥스의 말처럼 그는 단지 기록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훗날, 누군가가 정찬성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당신에게 시나리오를 의뢰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제안을 당신이 받아 들인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 당신은 정찬성의 마지막 경기를 프롤로그로 쓴 뒤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플롯을 구상할 거라 생각한다. 클라이맥스에서 당신은 마치 실제상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당시 상황을 리얼하게 옮기는데 충실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결과는?


영화를 찍고 편집해 놓고 보니, 배우의 호연에도 왠지 감동이 밀려오지 않는다. 그럴 땐 리사 크론이 클라이맥스로 돌아가 주인공이 대가를 더 쎄게 치르게 하라고 했던 것을 떠올려 보지만, 곧 그래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거라 그런 짓(!)을 했다간 리얼리티를 확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땐 음악과 음향효과를 빵빵하게 넣는 게 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동이라는 것, 즉 울컥하는 그 뭔가가 내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럴 때 당신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이런 말을 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우리는 이미 편집본을 너무 많이 봤어. 하지만 처음 보는 관객들은 눈물 콧물 다 쏟아낼 거야."


시사회 때 객석에 몰래 숨어든 당신은 스크린을 보는 대신 몸을 옆으로 돌려 앉아서는 관객들의 표정을 관찰한다. 정말 긴장된 순간이다. 하지만 관객들의 표정은 덤덤하다.


이때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관객들 수준이 너무 낮아.'


정말 관객들 수준이 낮은 걸까? 당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작가로서 당신의 미래는 딱 거기까지일 것이다. 왜, 관객들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걸까? 이유는 단 하나. 당신은 정찬성의 매력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이다.


매력이 무엇인가? 동경할 만한 인간이 나와 비슷한, 또는 내가 할 것 같은 그런 동질감을 보여줄 때 나타나는 것 아닌가. 내가 만든 공식으로 말하자면, '매력 = 동경심 + 동질감' 아닌가 말이다.


당신은 동경할만한 요소들은 모두 넣어서 시나리오를 썼지만, 동질감을 그리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당신은 항변할지도 모른다. 원본 영상을 보면서 충분히 정찬성의 매력을 느꼈다. 그러면 그 안에 동경심과 동질감이 모두 들어있는 거 아닌가. 거기서 매력을 못 느꼈다면 관객의 잘못이지 내 잘못이 절대 아니다.


아니다. 절대적으로 당신이 잘 못이다. 당신이 간과한 것이 있다.


당신이 본 것은 실제이지만, 그것을 당신이 글로 옮기고 영상화했을 때 그것은 허구인 것이다. 허구에서 인물을 묘사할 때는 반드시 동질감(내지는 동정심)을 그려줘야 한다. 그런 면에서 관객(인간)이란 존재는 참 신기한 일면이 있다. 실제 동영상이나 다큐에서는 등장인물이 실제 인물 그 자체이니까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동질감을 깔고 봐 주지만, 그것이 현실의 각색이라는 허구의 영역으로 넘어올 때는 철저하게 등장인물이 나와 같은 인간임을 먼저 확인시켜 주길 바라는 것이다. 매력의 또 한 축인 '동질감'을 말이다.


'불신의 자발적 정지(不信의自發的停止. 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라는 한 방에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있다.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콜리지의 <문학 평전>에 나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사람들은 어떤 허구의 작품을 감상할 때 그게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가짜라는 '불신'을 갖고 있다. 그런데 '불신'이 자신도 모르는 어느 순간에 '자발적'으로 '정지'되면서 작품을 제대로 리얼하게 느끼게 된다. 이때 그 어느 순간이란 바로 '허구'를 진짜로 믿는 순간인데, 그 순간은 바로 관객들이 감정이입을 하는 순간인 것이다. 즉, '불신의 자발적 정지'는 허구의 작품을 보다가 어떤 이유로 감정이입이 되어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 상황을 말한다. 그 어떤 이유에는 바로 동질감, 동정심 등이 있다(동질감은 '소명의 거부'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동정심은 '부당한 대우'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차차 이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우게 될 것이다).


결국, 이야기가 아무리 실제에서 가져왔다 한들 관객들은 그 작품을 가짜로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들은 그 가짜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불신의 자발적 정지'를 하기 위해 촉수를 뻗고 기다린다. 그러다 감정이입을 하는 순간, 즉 동질감과 동정심이 일어나는 지점을 찾게 되면, 관객들의 '불신(不信)'은 신(信)으로 바뀌며 작품에 온전하게 빠져드는 것이다.


이제 알겠는가? 당신이 무엇을 간과했는지?


아마 당신은 아마 이렇게 썼을 것이다.


싱가포르의 UFC 경기장. 정찬성과 맥스 할러웨이의 포스터가 보이고. 경기장을 꽉 채운 관객들 저마다 응원하며 함성을 지르고 있다. 선수 대기실. 정찬성 선수가 가볍게 몸을 풀고 있다. 그리고 다른 대기실에서는 맥스 할러웨이가 몸을 풀고. 케이지에는 장내 아나운서가 등장해 다음 경기를 소개한다. 드디어, 정찬성이 소개되고... 정찬성이 경기장으로 나가자 환호하는 관객들... 케이지에 오르고... 맥스 할러웨이도 올라온다. 드디어 맞붙는 그들....


근데 이렇게 다큐로 쓰면 안 되는 것이다.


프로 작가라면 최소한 이렇게 써야 한다.


선수 대기실. 정찬성 선수가 몸을 풀고 있을 때 한국에서 전화가 온다. 사랑하는 어린 딸이다.


"아빠, 안 무서워?"

"무섭긴. 아빠 별명이 뭐니?"

"코리안 좀비!"

"그래, 아빠는 말이야, 좀비처럼 절대 물러서지 않고 열심히 싸워서 맥스를 이겨줄 거야."

"응. 아빠 파이팅!"

"그래, 파이팅!"

"근데... 아빠, 다치지 마. 아빠 아픈 거 싫으니까."

"그럼, 당연하지."

"아빠, 사랑해."

"나도 사랑해."


이 정도만 넣어줘도 관객들의 불신은 정지된다. 왜냐하면, 경기장에서는 정찬성처럼 못하겠지만, 대기실에서는 자기도 딸에게 그렇게 할 것 같거든. 이렇게 동질감의 기준점을 찍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솔루션을 보고, 당신은 기시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당신이 과거에 봤던 작품에서 비슷한 장면을 있었을 것이 때문이다. 그렇다. 당신이 봤던 작품에 그런 장면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근데 그게 왜 있었냐? 주인공에 대한 동경심을 보여주기 위한 기준점으로서 동질감을 보여주기 위해 있었던 것이다. 딸과 하는 대화를 보니, 아빠인 나 같기도 하고, 우리 아버지 같기도 하고, 남편 같기도 하고, 오빠 같기도 한 사람인데, 다음 장면에서는 맥스 할로웨이와 맞서서 두려움 없이 싸움에 임하는구나! 관객들은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동질감이라는 기준점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동경심이 관객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큐에서는 동경심만 보여줘도 매력이 발산되지만, 픽션에서는 반드시 동질감이라는 기준점에서 동경심까지의 높이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프로 작가는 그렇게 쓴다. 하지만 우리가 선수라고 부르는, 그 위 레벨의 작가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정찬성이라는 주인공에서 감정을 더 이끌어 낸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딸과 통화를 끝낸 정찬성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제게 용기를 주십시오. 링에서 강한 상대로부터 물러서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제게 싸움에 나가 물러서지 않을 용기를 주십시오. 제 아이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게 힘을 주세요. 만약 제가 부족해 링에 눕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한 선수로 기억될 수 있게 해주세요."


이렇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게 되면, 관객들은 더욱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왜냐,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자기도 두려울 것이거든. 이런 상황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와, 코리안 좀비 정찬성도 한낱 나약한 인간이구나. 사실은 진짜 두려운 거구나(어머, 내가 감정이입해 줘야지!).


그렇다. 동정심, 즉 연민을 사용한 거다.


극본을 쓰는 스킬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혹자는 그런 건 클리셰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 선생님이 클리셰를 쓰지 말라고 했단 말이에요. 약을 파시려면 제대로 좀 파세요!


맞다. 클리셰이다.


근데 이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클리셰가 없는 극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니, 이렇게 말해 보자. 제작 투자가 이루어져 만들어진 드라마나 시나리오 중에 클리셰가 없는 것은 없다고.


만약 당신이 클리셰를 절대로 쓰면 안 된다고 말하는 선생님에게 배웠다면, 지금 이 순간 핸드폰을 꺼내서 그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지우거나, 수신거부를 해놓기 바란다(아마도 그 선생님은 내레이션과 회상신을 함께 묶어서 절대 쓰지 말아야 할 3종 세트라고 당신을 가르쳤을 지도 모른다).


클리셰는 안 써야 하는 게 아니라, 창조적으로 잘 써야 하는 것이다.


클리셰를 잘 활용하는 작가가 진정한 테크니션이다(클리셰를 창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이후에 다시 말하겠다).


매력 공식을 좀 더 발전시켜 보자.


매력 공식(매력 = 동경심 + 동질감)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매력 = 비범함 + 평범함


<무빙>의 주인공 김봉석의 동경할만한 요소는 하늘을 날 수 있는 초능력이다. 즉, 비범함을 가졌다. 그리고 동질적 요소, 즉 평범함은 바로 고3의 반에서 그리 주목받지 않는 아이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여자를 보면 가슴 설레고, 그런 그녀에게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순진한 아이 말이다.


여기에 연민적 요소(동정심)도 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다리에 모래 주머리를 차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닌다. 잘 때에는 혹시라도 부지불식 간에 날아가 버릴까 봐, 침대에 고정시켜 놓은 이불 속에 들어가서 잠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이성에게 좋아하는 감정이라도 품으면 모래주머니와 무거운 가방을 장착한 보람도 없이 몸이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한도 끝도 없는 원주율 숫자를 외운다. 초등력자의 고충이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매력은 동질감(평범함)이라는 기준점에서 동경심(비범함)까지의 높이가 중요하다고 앞서 말했다. 때문에 평범함이라는 기준점 아래에 있는 동정심(비루함 또는 비참함?)은 동질감보다 비범함까지 높이가 더 높으므로 치명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보통 비범한 인물이 비범한 능력을 가지면 매력이 없다. 그것은 평범한 인물이 평범한 능력을 갖는 것과 같으니까.


그런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


<아이언맨>에서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천재 엔지니어이자 억만장자이고, 저 잘난 맛에 사는 바람둥이다. 평범한 우리와 동질적 요소나 동정적 요소가 없다. 이런 인물은 보통 비호감이라 자칫 민폐 캐릭터가 되기 십상이다. 때문에 다른 전략으로 매력을 만들어 준다.


프롤로그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분쟁지역을 군용 차량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토니 스타크는, 차량에 탑승한 다른 군인들과 다르게 양복을 입고 있고 술까지 마시고 있다. 그러면서 군인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급기야 차 안에서 사진을 찍다가 폭격을 당하게 된다. 좀 한심하기까지 하다. 함께 타고 있던 군인들은 모두 다 죽고, 그만 간신히 살아남지만, 그마저도 폭탄과 함께 큰 부상을 입고 무장용병들에게 인질로 잡히기까지 한다.


타이틀롤이 지나가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면 토니 스타크의 이력이 몽타주로 소개된다. 천재에다 다이아몬드 수저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어느 시상식에서 토니에게 중요한 상을 주는데 정작 그는 카지노에서 도박 중이다. 우리는 감히 만져보지도 못한 돈을 한 방에 잃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 뿐만인가, 최첨단 시설이 있는 자신의 초호화 집으로 가는 길에 인터뷰를 원하는 여기자를 유혹해서 잠을 자고는, 그 뒤처리를 비서에게 맡기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기 일을 한다. 시청자와 동질적 요소가 1도 없다. 그렇다고 동정적 요소(연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캐릭터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아이언맨>에서는 인위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 보통 선수들은 이런 걸 '암수를 쓴다'라고 한다.


앞서 프롤로그에서 보여줬다시피 군용차가 폭격을 당해 같이 탐승했던 군인들이 모두 죽고, 홀로 살아남았지만 인질이 된다. 동정심이 유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동굴 안 감옥이다. 그가 잡혀있는 것이 왜 동굴인가 하면, 그가 원래 살던 곳은 바다 위 절벽 위에 지어진 초호화 주택이기 때문이다. 탁 트인 전망이 죽여주는 곳에서 개방감이라곤 전혀 없는 동굴 안. 이 대비감, 즉 콘트라스트가 좀 더 토니 스타크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드라마쟁이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를 그리더라도 마치 대통령 선거처럼 느껴지게 하라고. 즉, 감정의 스펙타클을 주라는 것인데, 자고로 나락으로 떨어질 땐 천국에서 지옥 끝까지 떨어져야 맛인 것이다. 그래야 연민이 극대화된다.


지금 토니 스타크가 바로 그런 상황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심장에 배터리가 연결돼 있다. 폭탄 파편이 심장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한 장치라는데, 그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이전에 무지 불쌍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 배터리가 자동차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그런 허접한 것 같은데, 바로 거기에 그의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연민이고, 그다음부터는 비범함이다.


그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천재적은 능력을 발휘해 각종 무기들을 바탕으로 아이언 맨 슈트의 프로토 타입을 만들어 입고는 탈출하기 때문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이런 멋진 탈출이라니 매력이 폭발한다.


다시 문명세계로 돌아온 토니 스타크는 자신의 회사가 무기 생산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회사에서 만든 무기들이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살상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 '각성'이라고 한다.


암튼 토니 스타크는 납치됐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각성'을 했고, 그 결과 숭고한 결정을 내린다. 주인공이 숭고한 결정을 하는 이유는 딱 하나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매력은 바로 숭고함에서 완성된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슈퍼 히어로들의 공통적인 매력 포인트가 무엇인지 알아보겠다.


슈퍼 히어로들의 동경할 만한 요소, 즉 비범함은 두 말할 필요 없이 그들의 초능력이다. 그렇다면 연민적 요소는 무엇일까? 그들이 하나의 개인으로서 누려야 할 행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령 슈퍼맨 클락 켄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려는 순간에 지구를 지켜야 할 일이 생긴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구를 지키러 가고, 데이트는 무산된다. 무사히 세상을 지켜내고 돌아오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단지 데이트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소시민 '배신자' 클락 켄트일 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슈퍼맨의 비애인 것이고, 그 이유 때문에 시청자들이 그를 응원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비인간이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를 얘기해 보겠다(로버트 맥키의 스토리에 나오는 얘기다).


터미네이터에서 로봇인 그가 화장실에서 반파된 자신의 몸을 셀프 수리한다. 그리곤 밖으로 나가는데, 그냥 나가면 그 장면은 평범한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터미네이터는 수리를 끝내고 나가기 전에 거울을 보면서 윙크를 한다. 마치 인간처럼. 그 장면은 그저 수리가 잘 되었나 테스트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지만, 관객들은 어라, 로봇이 윙크도 하네, 하면서 관객들은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며 터미네이터에게 매력을 느꼈다(로버트 맥키는 작가는 악인도 사랑해야지만 그런 매력적인 장면을 쓸 수 있다고 설파한다).


비인간을 매력으로 그리려면, 그에게서 인간다움을 발견하게 하면 된다.


<바비>에서 마고 로비는 바비 인형, 즉 비인간으로 나온다. 그녀의 동경할 만한 요소는 바비와 싱크로율이 높은 외모이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몸은 그렇다 치고, 정신은?


생각이 없다. 동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점점 바비라는 캐릭터에 우리는 빠져든다. 연민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바비는 인형이기 때문에 매일 똑같은 행복한 일상을 반복한다. 그녀는 그 반복되는 일상에 염증을 느낀다. 인간처럼. 그리고 매일 샤워를 하는데, 샤워기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그녀는 인형으로서 인형놀이를 당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인형은 샤워를 하지 않고 샤워 흉내를 낸다. 그리고 아침을 먹는데, 컵에 우유를 따르는데 당연히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빈컵을 들고 마시는 척을 한다. 영락없는 인형놀이의 한 장면이다.


작가는 매우 영리하게 바비라는 캐릭터에 연민이라는 도구로 감정이입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바비에게 인간성을 부여한다.


바비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인형에게는 죽음이 없다. 하지만 바비는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자신에게 내려진 '죽음'이라는 것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인형의 나라인 바비 월드에서 인간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게 된다.


하나 더 살펴보자.


<토이 스토리> 역시 비인간인 인형이 주인공이지만, <바비>처럼 인간이 출연하는 게 아니라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이런 애니메이션의 경우, 훨씬 더 섬세한 캐릭터 설계가 필요하다.


주인공 우디의 동경할 만한 요소는 무엇인가?


그는 인간이 없는 곳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능력을 보유한 인형들 중 하나이다.


동질감이나 동정적 요소는?


동질적 요소는 인간처럼 사고하고, 인형들 사회에서 어울려 사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매력을 발산하기가 쉽지 않다. 애니메이션은 인간들이 나오는 영화보다 감정이입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민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인간의 본성을 자극한다.


버림을 받는 것이다. 주인인 앤디가 대학생이 되어서 더 이상 장난감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용도폐기가 되어 다락에 갇히는 것은 그걸로 인형 인생의 종을 치는 것이다.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 중 하나이다. 연인에게서, 친구에게서, 부모에게서, 가족에게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모임에서 기타 등등. 그래서 시청자들은 우디가 다시 주인 앤디에게 돌아가기를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캐릭터의 매력은 결국, 시청자들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힘이고, 그 힘으로 시청자들은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


스토리나 극본을 하나 완성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고, 인간의 일천한 재주로 신을 흉내 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을 흉내 내 하나의 세계를 만들려면 이야기를 한 가지 방법으로 보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편협하고, 어딘가 빈듯한 엉성한 스토리가 나오기 십상이다.


스토리를 잘 쓰려면, 스토리를 입체적으로 다각도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즉, 로그라인을 통해서도 작품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주제를 통해서 작품을 통찰할 수도 있어야 하며, 하이콘셉트로 작품의 톤 앤 매너를 규정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캐릭터의 매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스토리텔링 방식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알려줄 개념과 전략을 통해서도 바라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번 글에서 '감정이입'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왔고, 또한 감정이입이라는 게 매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서 다음 장에서는 '감정이입'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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