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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라면순한맛 Sep 16. 2020

페달 위 퇴사 여행 - 1

포항to강릉, 3일간의 동해안 자전거 일주

  [퇴사일, 여행의 출발]

  "과거 열정적이셨던 분들이 웃으며 지난날을 회상하듯, 저도 xx에서의 5년을 돌이키며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기쁩니다." 라며 마지막 퇴직인사 메일을 예약하고는, 마침내 애증의 회사를 나섰다. 5년 간 매일 찾아왔던 광화문을 떠나던 그 길로 나는 지체 없이 포항으로 향하는 여행길에 올랐다.


  회사를 나선 시간이 오후 3시, 오후 6시에 출발하는 고속버스에 올라 포항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오후 10시의 깜깜한 밤이었다. 회사를 떠나오며 챙겨 온 짐을 정리할 새도 없이 최소한의 여행 짐을 꾸려 자전거를 대여한 뒤, 부리나케 떠나온 것이다. 퇴사 짐을 정리하기 전에 한바탕 즐겁게 놀고 싶었던 마음이 알게 모르게 반영된 일정이었나 보다.

'라이클'이란 어플에서 빌림. 별로 만족스럽진...

  사실 이번 여행은 나의 퇴사 여행이자, 고향 친구의 여름휴가였다. 동행하기로 한 친구는 당일 오전에 이미 포항에 도착하여 미리 호미곶 라이딩을 다녀온 뒤였다. 친구가 미리 잡아둔 숙소에 짐을 푼 뒤 씻고 맥주 한 캔을 하고 있으니, 라이딩 후 포항 지인을 만나러 갔던 친구가 돌아왔다. 그는 호미곶 라이딩이 이번 여행의 예방접종과 같았다며  비를 흠뻑 맞고, 못을 밟아 바퀴 펑크 나는 등의 고생을 풀다. 나는 퇴사의 후련함과 여행의 설렘, 날씨에 대한 걱정과 새 직장에 대한 막연함을 이야기했다.


[1일 차, 비가 내리다 말다 페달을 밟을까 말까]

  여행 첫날이 밝았다. 오늘의 라이딩은 영덕을 거쳐 울진 후포항으로 향하는 89km의 여정이었고, 목적지인 후포항에서 친구들을 만날 참이었다. 날씨가 왠지 궂을 것 같더라니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왔다. 그리고 시작부터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딩을 위해 최소화하여 챙겨 온 짐가방을 대여해 온 자전거에 연결해야 했는데 대여 자전거가 생각보다 작기도 고, 내가 준비해온 연결 키트로 단단히 고정이 잘 안 되는 것이었다. 타이트한 일정에도 여행을 강행하고 싶었던 나머지 준비가 미흡했던 나의 불찰이었다.

다행히 친구는 여행을 꼼꼼히 준비해왔고, 그의 짐받이에 나의 가방을 고정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지만 내 짐을 친구가 운반하게 된 상황이 미안했다. 뜻밖의 상황에 자책을 하며 우리는 여행의 시작점인 영일만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포항 영일만해수욕장. 이때만 해도 괜찮은 줄...

  영일만 해변 앞 편의점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본격적으로 라이딩을 시작하였다. 나의 퇴사 여행은 시작됐고 적당한 빗줄기는 산뜻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그런데, 빗줄기가 심상치 않았다. 비는 점점 거세고 심지어 바닷바람에 매우 거센 비바람의 모습으로 우릴 괴롭히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연신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동해안 자전거길이라는 타이틀에 막연히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평탄한 도로만을 예상한 내가 바보 같았다. 초등학교 과학시간에도 나오는 한반도의 지리적 특징 '동고서저'를 왜 미리 떠올리지 못했을까... 비와 바람과 오르막길이 연신 우리를 괴롭히자 슬슬 헛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할많하않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고, 우리는 조금씩 악천후에 적응해나갔다. 나쁘지 않은 페이스로 라이딩을 이어나갔고, 오후 1시 20분쯤 영덕의 모 항구에서 점심을 먹었다. 영덕 하면 대게! 대게 하면 영덕!이니 신나게 대게로 배를 채웠다. 후회 없는 최고의 점심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이후의 라이딩에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대게 하면 영덕!이라는 명제는 틀렸다. 포항부터 영덕, 울진, 동해까지 대게는 대한민국 동해안을 지배하고 있다. 도처의 모든 조형물은 대게로 디자인되어 있고, 거의 모든 음식점에서 대게를 판매하고 있다. 대게는 위대하다.

순삭... 츄릅

  대게로 배를 채우고 다시 라이딩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의 날씨도 날씨 었지만, 지난 풍들의 아픈 흔적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휘어지고 쓰러진 이정표들과 심심찮게 발견되는 작은 싱크홀들. 점점 극기훈련과 같은 라이딩이 이어졌다.


  첫날 가장 큰 상황은 목적지를 목전에 둔 오후 6시쯤 발생했다. 잘 가다가 자전거 체인이 똑 끊어진 것이다. 아니 체인이 빠진 것도 아니고 끊어져버리다니... 7번 국도 한가운데서 멘탈이 슥 나가려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목적지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들이 차를 타고 미리 와있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목적지의 자전거방까지 이동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할많하않(2)

  앞서 말하진 않았지만 자전거 핸들이 돌아가 육각렌치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는 등 대여해 온 자전거가 말썽을 많이 부렸다. 대여 서비스를 너무 과신한 나의 불찰이다. 자칫 자전거 라이딩을 이어나갈 수 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연이어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슥슥 해결책이 나와 라이딩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사실 동행한 친구는 여행 베테랑이다. 히말라야 산행부터 유럽 배낭여행까지 다채로운 경험이 있는 그가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신이 있나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여행 중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족족 해결책들이 나오는 상황들이 신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신의 존재가 아닌 개인의 준비성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닐까 했다. 적어도 오늘은 그의 짐받이와 육각렌치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나름 안정된 모습

  이후에는 즐거운 시간이 이어졌다. 차로 합류한 2명의 친구까지 고향 친구이자 고교 친구인 우리는 즐겁게 술자리를 가졌다. 고단했던 우리는 10시쯤 뻗어버렸다.

순삭... 츄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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