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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Dec 31. 2019

2019년 최고의 영화 10편


아무런 권위나 공신력은 없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한 해 동안 신나게 영화들을 관람한 한 명의 관객으로서 2019년 최고의 영화 10편을 선정해봤다.


선정 영화들의 기준은 2019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정식 개봉 한 영화들로 잡았으며 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상영된 영화, 재개봉 영화는 제외했다.


순위는 필자의 개인적인 취향에 전적으로 의존해 선정한 것이므로 공감할 수 없거나 못마땅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각자가 생각한 리스트가 있다면 재미 삼아 비교하면서 보면 좋을 것 같다






10위.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by 후보


강렬한 데뷔작인 동시에 안타까운 유작이 되어버린 후보 감독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가 2019년의 영화 10위다. 후보 감독의 자살을 두고 중국의 6세대 거장 감독 왕 샤오슈아이가 엮이면서 중국 내에선 설왕설래가 많지만 확실한 건 우리가 젊고 가능성 넘치는 감독을 하나 잃었다는 것이다. 영화 자체도 우울함과 좌절감을 타협 없이 다루고 있고 4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내내 유지해 온 잿빛 풍경의 이미지는 감독의 자살과 맞물려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일말의 희망이나 구원 따위 온몸으로 거부하는듯한 연출 스타일은 캐릭터뿐만 아니라 관객마저 짓누르는 듯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보이진 않아도 코끼리는 여전히 그곳에 있기 때문에.






9위. <경계선>

by 알리 아바시


수많은 영화들이 차별을 테마로 잡는다. 특히 요즘 시대에 더 그렇다. 영화계를 넘어 문화계는 소위 말하는 PC 열풍에 잠식됐으며 이미 이 주제는 닳고 닳은 진부한 주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진부한 주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점이 인상적이다. 영화는 우리가 그토록 울부짖던 차별 타파와 평등을 포장 없이 민낯으로 마주할 수 있게 만든다. 방향은 다르지만 유사한 주제를 다뤘던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내가 느꼈던 의문과 비열함이 이 영화에서 비로소 해소되는 느낌이다. 이미지를 완성시키는 유려한 편집과 조금은 유난스럽게 느껴질 법한 클로즈업을 사용한 영화의 형식이 진부할 수도 있는 주제의식을 더욱 생경하게 만든다.






8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by 쿠엔틴 타란티노


진짜 영화광이기에 바칠 수 있는 추모와 위로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타란티노 감독의 9편 영화들 중 가장 뛰어난 영화는 아닐지언정 가장 웃긴 영화는 이 영화라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샤론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릭은 현장에서 연기를 하고 부스는 고장난 티비의 안테나를 고친다. 우리에겐 끝내주는 연기를 보여줄 릭 달튼이 필요하고 화끈한 액션을 보여줄 클린트 부스가 필요하며 꿈 많고 따뜻한 이웃 샤론 테이트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걸 프레임에 담아 펼쳐줄 영화라는 세계가 필요하다. 뻐킹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가 필요한 이유가 <원스 어 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있다.






7위. <서스페리아>

by 루카 구아다니노


자극적인 시청각적 요소를 혼합해 독보적인 분위기를 만든 전설 동명 원작을 리메이크한 <서스페리아>는 큼지막한 줄거리와 제목을 제외한 모든 게 원작과 다른 영화다. 오직 원색적인 자극에 집중해 오컬트 영화의 레전드로 남은 원작과 달리 리메이크작은 '이게 정말 오컬트 영화는 맞나?' 싶을 정도로 현실의 역사와 영화를 맞대어 공명하는 정치적인 영화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 정치성을 위해 리메이크를 결정한 게 분명하지만 표면상으로 보이는 오컬트 영화로서의 역할도 매우 훌륭히 해낸다. 개인적으로는 자극에 모든 것을 집중한 원작과 비교해봐도 리메이크작이 결코 오컬트로서의 자극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리메이크작이 만드는 공포감이나 기괴함이 전작에 비해 훨씬 아름답고 세련됐다. 구아다니노 감독의 <서스페리아>는 아르젠토 감독의 <서스페리아>를 모든 면에서 앞지른 훌륭한 리메이크 영화다. 이 영화의 엔딩은 올해 가장 충격적인 엔딩이기도 하다.






6위. <미드소마>

by 아리 에스터


예쁘다는 감탄사가 나오는 화려하고 밝은 색감, 대낮이라는 설정, 느릿하고 긴 호흡의 장면 연출 등은 일반적인 공포영화의 클리셰들을 탈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넘어서는 어떤 경지를 보여주겠다는 아리 에스터 감독의 패기로까지 느껴진다. 특히 초반부에 등장하는 몽타주를 이용한 씬 전환이나 상하반전의 카메라 연출들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영화는 초반엔 심리 드라마, 중반엔 미스터리, 후반엔 다큐적 접근으로 하지제 의식에 집중하는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공포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후반부의 이러한 접근법이 실망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다. 영화가 중반부까지 보여준 유려한 카메라 연출과 독특한 편집술 역시 후반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아 뒷심이 부족하다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기이한 이미지들과 소름 끼치는 음향의 조합은 관객들마저 취하게 만든다. 장르적 감각이 부족하다 느껴지는 후반부 역시도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약을 먹여 의식의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묘한 에너지가 있다. 마치 중반부까지 재미있는 공포 영화로 관객들을 홀려 후반부에 이르러 준비한 의식의 제물로 바치려는 연출적 악취미 같다. <유전>과 <미드소마>를 거친 아리 에스터 감독은 오컬트 영화, 그중에서도 의식을 주제로 한 오컬트 영화의 거장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5위. <행복한 라짜로>

by 알리체 로르와커


영화의 주제는 현실적인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접근법은 매우 동화적이다. 프레임에 담기는 모든 인물들은 라짜로를 제외하곤 계급과 빈부에 상관없이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추악한 인물로 그려진다. 때문에 라짜로의 현실을 초월한 선함과 세상의 추악함이 주는 괴리는 충격적일 정도로 대비가 되고 관객이 느끼는 낙차는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이 낙차는 라짜로를 연기한 배우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공이 크다. 이 남자의 얼굴엔 대천사의 청명함이 강림했다. 올 해의 얼굴이자 올 해 가장 동화 같은 영화.






4위. <기생충>

by. 봉준호


한국 영화 역사상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은 2019년, 한국 영화 100주년과 시기적으로도 맞물려 '시의적절'한 걸작 대우를 받았다. 물론 100주년이 아니었어도 <기생충>은 충분히 훌륭한 영화다. 개인적으로 개봉 전에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였다. <설국열차>와 <옥자> 연달은 전작들이 실망스러웠기에 봉준호는  전성기가 지나 하락세를 타는 감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바보 같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기생충>은 봉준호의 새로운 전성기를 여는 대표작 반열에 올랐다.
현대 사회의 구조에서 빈부격차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현상과도 같다는, 그러므로 거스를 수 없다는 영화의 기조는 특유의 기괴한 이미지들과 어우러져 한 편의 지독한 우화를 완성시킨다. 씨네마로 봐도 만족스럽고 한 편의 재미있는 오락영화로 봐도 훌륭하다. 새로운 기점을 맞은 봉준호의 다음 '계획'이 기대된다.






3위. <지구 최후의 밤>

by. 비간


플롯의 궤적이 뒤틀려있어 러닝타임이 진행될수록 조각이 맞춰지기는커녕 점점 파편이 되어 깨져나간다. 이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서사로서의 역할이 아닌 잔상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타르코프스키에게 헌사하는 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그를 연상케 하는 최면적인 미쟝센들은 서사의 잔상을 스크린에 구현하며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러닝타임 중반에 등장하는 타이틀 크레딧을 기준으로 1부, 2부가 나뉘는데 2부에서 보여주는 과감한 구성과 비범한 이미지들은 작품에 대한 감독의 야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중국 영화계에 축복 같은 감독이 등장했다.






2위. <살인마 잭의 집>

by 라스 폰 트리에


잔인하다, 폭력적이다, 위험하다 같은 수식어로 이 영화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안일한 설명이다. 이 영화는 사악하다. 흔히 강도 높은 수위를 자랑하는 영화들의 마케팅은 '끝까지 간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살인마 잭의 집>이야말로 진짜 끝까지 가는 영화다.
자신의 살인은 예술이라 주장하는 잭의 궤변은 당연하게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들린다. 잔악무도한 살인마 잭은 반성이나 후회 없이 계속해 궤변을 뱉어내고 그의 행동 역시 동정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사악한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희생자(우마 서먼)가 잭에게 먼저 시비를 걸고 무례하게 굴다 렌치로 얼굴을 내려 찍혔을 때, 당신은 일종의 통쾌함을 느끼지 않았나? 잭이 살해 현장을 정리하고 있다가 경찰을 만났을 때, 당신은 잭이 잡힐까 조마조마해하지 않았나? 이 극악무도한 인간이 절벽을 타 지옥을 빠져나가려 했을 때, 당신은 잭이 절벽에서 떨어질까 불안해하지 않았나? 우린 라스 폰 트리에의 사악하지만 아름다운 예술관에 감화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1위. <결혼 이야기>

by 노아 바움백


이혼을 실패나 증오로서가 아닌 허무함과 복잡한 현실로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이 참신하고 날카롭다.
LA와 뉴욕의 위치만큼이나 벌어진 부부의 내면을 자극적인 설정이나 연출 없이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노아 바움백의 차분한 연출은 모던한 배경들과 어우러져 빛을 발한다.
영화는 단순히 결혼 생활의 현실적인 균열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 균열이 긴 세월에 걸쳐 축적되었듯이 결혼의 본질인 사랑 역시 축적되어 한 켠에 쌓여 있었음을 잊지 않는다. 때문에 <결혼 이야기>는 매우 현실적이고 통렬한 이야기이면서도 묵직한 울림이 있는 성숙한 러브 스토리다.






총평


2019년은 한국 영화에 있어 기념비적인 해다. 세계 영화계 최고 권위상인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영화가 나왔고 내부적으로는 영화사 100주년을 맞은 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근본을 챙긴 한 해였을지는 몰라도 정작 중요한 내실인 한국 영화들의 전체적인 퀄리티에 대해선 갸우뚱하다. 개인적으로 2019년 한 해 동안 '괜찮았던' 한국 영화들은 몇 편 있지만 '좋았던' 영화는 <기생충> 단 1편 뿐이었다. 영화의 질적 저하 외에도 대기업 영화들의 계속된 스크린 독점과 대형 오락 영화에만 극도로 쏠린 대중들의 관심, SNS나 유튜브 등의 플랫폼에서 파생되는 과도한 영화까기의 유행화 역시 우려스럽다. 올해 이러한 현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예시가 영화 <우상>이 아닐까 싶다. 사운드에 문제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100억이 넘게 투입된 대형 영화가 최종적으로 18만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다는 건 너무나 가혹한 대참사다. 이 정도 푸대접을 받을 정도로 퀄리티가 낮은 영화는 절대 아니었기에 마음이 더 아프다. <우상>은 올해 가장 저평가받은 영화다.


올해는 중국 영화의 약진도 돋보였다. BEST 10 안에도 있는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지구 최후의 밤>이 모두 신인 감독들의 영화라는 게 중국 영화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영화제 프리미어 영화라 순위 안에는 없지만 왕 샤오슈아이 감독의 <나의 아들에게>는 엄청난 걸작이다.


할리우드에서는 <어벤져스> 시리즈가 사실상 막을 내리며 박스 오피스 신기록을 다시 썼고 <조커>가 황금 사자상을 수상하며 코믹스 영화의 새 역사를 썼다. 마블의 새로운 영화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제 코믹스 기반 히어로 영화들은 서서히 침체기를 맞지 않을까 예상한다.


넷플릭스 영화들의 활약매섭다.  해에만 <두 교황>, <아이리시 맨>, <결혼 이야기> 같은 좋은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작년 <로마>에 이어 각종 부문에서 아카데미 시상을 폭격할 준비를 마친 것 같다.


2019년은 2018년보다 좋은 영화를 많이 만났다. 영화를 보는 시간은 대부분 행복한 시간이었고 내년에도 좋은 영화들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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