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와 대화의 거리

아..안녕..안녕하..

by 서린

어릴 적 나는 골목대장이었다. 첫째는 아들이었으면 했다는 부모님의 바람을 하늘은 절반만 들어주셨는지 장군 같은 딸, 내가 태어났다. 유치원 시절부터 또래보다 한 뼘은 더 컸던 탔에 나는 항상 눈에 띄었고, 자연스레 친구들을 챙기고 무리에서 열외 되는 인원이 없도록 주변을 그렇게 살폈다고 했다. 내 기억 속에도 나는 늘 친구들을 우르르 몰고 다녔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막 사회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차분하고 조용했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임원과의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식사하셨어요?" 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고,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내 의견을 곧잘 얘기했다. 보통은 경직된 자세와 태도로 윗사람을 대하는 직원들과는 다르게 편하게 다가가는 내가 오히려 반가우셨는지 내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여주시는 것도 같았다. (편하게 대하는 게 선을 넘으라는 뜻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길)


꽃길은 아니더라도 굴곡 없이 평평한 아스팔트 길일 줄 알았던 나의 직장 생활에도 작은 시련과 함께 변곡점이 찾아왔다. 이 시련의 순간에 대해서는 다음 에피소드에서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이 순간을 기점으로 나는 보고는 물론이고, 벤더와의 회의에서도 떨 정도로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망했다... 마음을 다 잡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간의 직장 생활이 무색할 정도로 자신감 가득했던 나의 마음은 어디까지 도망간 건지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해 떨리는 상황들에 스스로를 더 노출시켜보기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기도, 스피치 학원을 알아보기도 했다. 다양한 시도에도 회복될 기세가 없어 보여 고민에 빠져있던 중 문득 하나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예전 내가 속해있던 조직에서는 오랜만에 출시하는 신제품의 런칭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많은 임직원들이 이 제품의 런칭을 위해 몇 달 동안 공을 들였고, 런칭 성공 여부에 수많은 사람들의 프로모션이 달려있었다. 게다가 역대 최대 규모, 회장님이 직접 호스트로 참석하는 행사였다.


그렇게 디데이가 다가왔고, 행사 전일 리허설을 위해 나와 B 상무님이 대역으로 급하게 선발되었다. 쩌렁쩌렁한 음향과 무대 효과로 혼이 다 빠져나는 걸 간신히 부여잡고 있을 때쯤, 저 멀리 검정 무리가 무대로 점점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회장님이 리허설에 직접 참관하러 오신 것이다.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주변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무대 위 나와 B 상무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스크립트를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하지만, 그가 자리에 착석을 하고 무대를 바라보는 순간 말이 꼬이기 시작했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어찌저찌 내 분량을 다 읽고 나서 (사실 어떻게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다음 차례인 B 상무님의 발표를 무대에 서서 흘깃 쳐다봤다. 살짝 보이는 상무님의 옷깃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어.. 이상하다? 여기는 실내인데...?'


그리고 옆을 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B 상무님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계시다는 것을...

두 주먹을 꽉 쥔 채, 코앞에 앉아 있는 회장님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시며 최선을 다해 발표를 이어가고 계셨다.



평소 말을 잘하던 사람도, 사람들 앞에서 의견을 얘기하는 자리에 서면 떨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을 청자가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고민하며 준비했고 그 과정에 진심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하나의 사건 이후에도 흔들림 없이 더 잘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 모든 순간들이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서 더 떨렸던 게 아닐까 싶다.


이 에피소드를 되뇐 후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받아들이기'였다. 목소리가 떨리면 떨리는 대로, 말이 꼬이면, 꼬이는 대로. '아, 내가 지금 떨고 있구나. 그만큼 내가 진심이구나.' 받아들이고 발표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보면 내 마음도 이내 분위기에 적응을 한 건지 떨림은 잦아들고, 나의 페이스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사회 초년생도 아니고 연차가 꽤나 쌓인 내가 떨다니.. 스스로도 당황스럽고, 부끄럽고, 또 작아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다.


'괜찮아. 다 떨린다. 임원도 떠는데 나라고 별 수 있나?'


그리고 떨림은 틀림이 아니다. 단지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을 뿐이다. 내 마음이 스스로 길을 찾아 다시 단단한 목소리로 나올 수 있도록 조금 기다려주자.

금요일 연재
이전 05화주인 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