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00'의 시대(1)

서막

by 향연

이른 새벽,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그가 눈을 뜬다.


시간은 오전 4시 30분.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걸 느끼며 쭉 기지개를 켠다. 일찍 잠들었지만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여전히 피곤하다.


아직 울지 않은 알람을 모두 해제하고 분주히 나갈 채비를 한다. 우선 차가운 물로 세안을 해 정신을 깨운다. 그리고 어제 꺼내놓은 옷을 챙겨 입는다. 땀이 금세 마르는 내의와 얇은 기모가 든 등산 바지, 경량 패딩.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무릎 보호대도 낑낑대며 두 다리에 끼워 넣는다.



목이 탄다. 생수 한 병을 벌컥벌컥 마시려다가, 화장실에 자주 갈 것 같아 그만둔다.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그는 그다음에 무얼 하려고 했는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방안을 한 바퀴 돈다. 그러다가 기억이 난 듯 가방에서 핫팩을 꺼내 흔들어 놓는다. 3개 정도면 좋을 듯하다.


갈 곳을 잃은 그의 손이 허공을 배회하다가 아하 하는 제스처를 취하곤 이번엔 양말을 집는다. 발이 시릴 것 같아 두 겹을 신는다. 안쪽에는 면양말을, 바깥쪽에는 모양말을 겹쳐 신어 보온성을 높인다.


장갑은 혹시 몰라 두 켤레를 챙긴다. 손발이 찬 그는 항상 몸의 가장 끝부분이 열을 빼앗기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쓴다. 핫팩 역시 그런 이유에서 그의 가방에 상비되어 있다.


그는 물과 보조 배터리, 초콜릿, 휴지와 물티슈가 든 가방을 메고 잊은 건 없는지 한번 방 안을 둘러본다. 그러다가 황급히 탁자 위에 놓인 털모자를 집어 든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머쓱해하며 모자를 쓴다.



이제 신발을 신는다. 신발장에 알 수 없는 기간 동안 묵혀둔 등산화가 제법 잘 맞는다. 태어나서 처음 사본 아이젠이란 것을 신발에 끼운다. 방법을 몰라 애를 좀 먹었지만 마치 세트처럼 등산화에 잘 어울린다. 마지막으로 급하게 구매한 등산 스틱까지.


다 차려입고 거울을 보니 제법 산행 좀 해본 사람 같다. 갑자기 왠지 모를 뿌듯함이 생기며 등산이 체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어 떨쳐버린다. 하여간..


문을 나서기 전, 그는 귀를 덮도록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한숨을 한 번 푹- 내쉰다.


'좋아, 진짜로 가는 거야. 이번엔 꿈이 아니라 현실이야.'



결연한 표정을 한 그는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내려 문을 열다가, 달칵하는 소리에 흠칫 놀라 얼음이 된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복도에서는 문이 열리는 소리도 매우 크게 들린다. 문이 소리를 내며 열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살금살금 발끝으로 걸어 나온 후에는 아주 천천히 문을 놓는다.


문은 그의 손을 떠나 슬로우 모션처럼 아주 느리게 제자리로 돌아간다. 다-알-칵.


그 사이에 그는 아주 민첩하게 엘리베이터 앞까지 온다. 마치 307호에서 나오지 않은 것처럼, 아무도 그가 307호의 투숙객인걸 모르도록 말이다. 그는 잠금장치가 서로 꼭 맞아떨어지는 소리가 꽤 작게 들렸음에 안도하며 내려가는 버튼을 누른다. 그러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띵-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다니. 어떻게 이렇게 생각이 짧을 수가.'

어젯밤 미리 계단 센서등이 나갔음을 확인해 두었던 걸 그만 깜박했다. 역시 지나치게 긴장한 탓이겠지.


그는 열린 엘리베이터 문과 어두운 계단을 번갈아 본다. 그러다 생각한다.

'아니지, 내가 범죄를 저지르려는 것도 아닌데 못 탈 게 뭐람.'

그의 얼굴엔 왠지 모를 자신감과 오기가 비친다. 당당해 보이려고 들썩이며 올라간 어깨와 살짝 비뚤어진 입가는 덤이다.


그러다가 괜히 CCTV에 찍혀 좋을 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까치발로 계단을 향한다. 이미 엘리베이터 안 카메라에는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모습이 다 찍혔을 텐데. 그건 생각 못한다.


텅 빈 로비를 지나 1층 야외 주차장으로 나온다. 건너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숙소를 잘 선택했군. 이 정도야 뭐.'

그는 자신의 치밀함에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며 차에 시동을 건다. 라이트는 1단만 켠다. 눈에 띄어 좋을 건 없으니까.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검색하고 안내를 누른다.


설악산 무지개 주차장’.


'무지개 주차장이라니. 쳇 민영 주차장이었군. 부럽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살며시 악셀을 밟는다.

10살이 넘은 그의 자동차가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희미한 빛을 남기며 사라진다.


아무도 모르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