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티노가 너무 좋아서 열 번째 영화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쓴 글
열 편의 영화를 만들면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한 괴짜 감독. 이제 아홉 편을 지나 마지막 한 작품만을 남겨놓고 있다. 10편의 대장정을 마치면 그에 대한 수많은 평가가 이뤄질 것이 다. 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감독이 만든 작품들이 그렇듯,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이전의 것들을 미리 정리해보는 것 또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 사료된다. 나는 이전의 작품 아홉 편을 통해 마지막 작품을 더 재미있게 감상하기 위한 밑바탕을 마련하고 자 한다. 아마 이 글을 다 읽고 난 뒤에는 타란티노를 알던 사람이라면 설렐 것이고, 타란 티노를 몰랐던 사람이라면 궁금증이 터질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할리우드에서 자신만의 장르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감독일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그것을 ‘타란티노 장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의 작품들은 과거에 선보였던 장르를 철저하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닌 타란티노만 할 수 있 는 방식으로 재구성을 하는 것이다.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며 쌓은 데이터베이스를 자유자재 로 다루는 능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다양한 장르의 부족함을 알고 있고, 그래서 그 빈 공간을 자신의 DNA로 채운다. 마치 쥬라기 공원에서 공룡의 부족한 DNA를 개구리의 것으로 채우듯이. 그것이 본인 그 자체로 장르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 다. 타란티노의 DNA를 알게 되면 그의 영화는 항상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타란티노 영화 의 평이 재미있거나, 미친 듯이 재미있거나로 구분되는 기준은 그의 DNA 농도 차이일 것이 다. 그래서 그의 유전자를 찾아보고 영화 속에서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 파헤쳐보려 한다.
챕터 1. 오마주 덩어리 :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간직하는 것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일수록 타란티노의 영화는 재미있어진다. 끝도 없이 숨겨진 오마주 를 찾는 재미 때문이다. 인터넷에는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오마주들을 모아놓 은 자료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자료의 방대한 분량에 시네필이라는 사람들도 타란티노 앞에서는 고개 숙이게 될 것이다. 가령 <펄프픽션>에서 미아와 빈센트가 춤을 추는 장면이 나 싸우는 장면에서는 일본도를 사용하는 등의 수많은 것들이 전부 오마주이다. 타란티노가 만드는 영화들이 모두 오마주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모든 장면을 어떤 영화에서 가져왔는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페르소나 같은 배우들이 듣도 보도 못한 영화를 나열하며 장면을 설명하는 타란티노를 보며 매우 놀랐다는 일화는 이제 식상할 정도다.
타란티노는 오마주라는 표현 방식을 단순히 존경을 넘어 자신이 영화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표현하게끔 도와주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자 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누군가는 진심 가득한 대화를 나누듯이 타란티노 도 오마주의 방식으로 기존의 것을 재해석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단, 그 장면이 오마주라는 것을 찾아내지 못한 관객이라면 그 의미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그런 단점을 모두 제쳐두고도 ‘타란티노 장르’가 마냥 재미있는 이유는 오마주 인지도 모르게 숨겨놓거나 오마주를 가장 애정이 가는 장면으로 탈바꿈시켜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타란티노의 영화를 오마주 하기 시작했다. 오마주 장면을 오마주 하는 것이다. 타 란티노의 색은 점점 더 또렷해졌고, 마침내 그 색을 따라 표현하려는 사람이 나타났다. 어 쩌면 ‘오마주라는 것이 의미 있는 장면을 존경을 담아 다시 재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 히 그 모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영화들 속에서 오마주를 오마주답게 표현한 영화는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타란티노가 오마주를 얼마나 잘 살리는지 알 수 있다. 거기에 더해 타란티노의 유 난히도 독창적이고 기발한 해석까지 생각한다면 타란티노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사실은 언 젠가 인정받았을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챕터 2 쫀득한 대사 : 쓸모없는 듯 쓸모있는
타란티노의 영화를 떠올리면 가장 많이들 떠올리는 것이 ‘시끄러운 수다’ 일 것이다. 그 만큼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대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시간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크다. 그래 서 사람들은 영화의 대사들 중에서 의미 없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의미가 없다는 말은 영화에 어떤 존재감도 가지지 않는 대사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대사는 타란티 노의 영화에서는 없다. 타란티노의 첫 작품인 <저수지의 개들>은 정말 시간 흘러가는 줄 모 르는 대사의 향연만이 존재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나오는 ‘Like a virgin’에 대해 각자의 의 견을 열변하는 작은 토론이 영화의 이후 이야기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 면 정말 독특하다. 자신의 데뷔작에서 영화의 이야기에 영향을 주지 않는 대사를 가장 먼저 내세울 사람이 누가 있을까? 타란티노는 마음만 먹었다면 시작의 테이블에서만 한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깔끔하게 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와 상관없이도 그 많은 대사를 그저 즐겁게 소비하게끔 만드는 것이 타란티노가 원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 서 관객들은 캐릭터에게 정을 붙이게 된다. 자신의 일상 대화를 영화 속에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많은 것들이 가능했음을 첫 번째 작품 부터 입증했다. 그 정도로 타란티노의 대사는 매력이 있다. 실없기도, 정곡을 찌르기도 하지 만 그 모든 대사가 한 마디의 말을 벗어나 영화 전체에서 바라볼 때 소소한 의미들을 갖는 다는 것이 타란티노의 대사가 끝내준다는 방증이다.
영화에서 대사가 가지는 힘은 엄청나다. 하지만 그만큼 오용이나 남용을 하게 되면 영화 의 완성도는 떨어지게 된다.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들에게 대사의 남용은 반드시 지양되어야 하는 존재였다. 반드시 필요한 말만 함축적으로 하는 것이 미덕으로 받아들여지던 영화계에 서 타란티노는 정반대의 시도를 했다. 그리고 깔끔하게 안타를 때려냈다. 사람들은 식당 테 이블에서 비속어를 섞으며 떠드는 다섯 남자의 대화를 좋아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199 2년에 시작된 타란티노의 대사는 2020년이 되어도 여전히 그 가치를 유지하며 어떤 상황 에서도 대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이 세상에 나오면 더 이상 대 사가 중심이 되는 영화에서 타란티노만큼의 재미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챕터 3 만화 같은 죽음 : 과함으로써 통쾌함이라는 목적을 이뤄내다.
쿠엔틴 타란티노를 흔히 ‘잔인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피가 낭자하고 살 점이 흩어지는 것을 쉽게 떠올린다. 하지만 타란티노의 모든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진지한 죽음을 다룬 적이 없다. 실제 피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타란티노의 피가 가짜라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어색해 보일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등장인물의 행동조차도 자신 이 죽고 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본인이 직접 인터뷰에서 말했던 ‘영화는 영 화일 뿐이다.’라는 가치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죽음, 만화 같 은 죽음이 죽음 자체를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악으로 표현되는 인물들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데스 프루프>에서도 악을 낭떠러지로 끝까지 밀어붙여 관객들에게 분노를 쌓은 다 음 마무리로 화끈한 복수를 하고, <킬 빌>에서 복수의 명분을 충분히 쌓아준 다음 처치하기 좋은(혹은 처치하고 싶은) 악당을 통쾌하게 죽이는 장면(일명 도장깨기)을 넣음으로써 ‘너희 는 그래도 싸다.’라는 생각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서는 대놓고 나치를 등장시킴으로써 ‘죽음 더미’를 수없이 등장시킨다. 죽어 마땅한 등장인물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하는’ 타란티노의 상상은 스트레스 해소가 필요했던 관객들의 상상도 자극시킨다. 관객이 영화를 영화로 바라볼 때 비로소 타란티노의 상상과 관객의 상상이 만 나며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굳이 제4의 벽을 넘지 않아도 관객은 완벽하지 않은 죽음 장면 에서 자연스럽게 이것이 영화임을 느낀다. 그리고 스크린 밖에 있음에 안도감을 느낀다.
잔인한 영화는 이미 많았다. 더 실제 같은 연출, 더 많은 피의 분출만을 추구하는 영화들 도 늘어갔다. 그러면서 영화 속 피의 등장으로 얻는 것이 무엇인지도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그런 영화들 속에서 타란티노는 ‘인물의 죽음은 이렇게 쓰여야 한다.’라고 제시했다.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속으로만 참고 있는 수많은 찌질이들에게, 분노를 가득 담고도 뿜어내지 못하던 현자로 발전 중인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 같았던 타란티노의 선언은 그의 영화 속에 서 죽어나가는 악당들 마저도 죽음으로써 가치를 가지게 되는 효과까지 얻었다. 어떤 것보 다 통쾌한 죽음을 선사해온 타란티노의 영화는 그래서 누가 죽을지는 금방 정해지지만 어떻 게 죽을지를 상상하는 즐거움으로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든다. 어쩌면 타란티노는 심리학을 공부했거나 인간의 호르몬에 대해 공부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사람의 쾌감 을 정확하게 공략할 수 없다.
결론
이 글의 시작이 우리가 볼 수 있는 타란티노의 마지막 작품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마 지막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타란티노의 마지막 작품에 대한 실마리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이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를 유출당한 타 란티노에게 이번만큼은 유출 없이 온전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싶을 것이다. 그래 서 우리는 차분하게 기다려주어야 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아홉 편의 작품을 모두 감상한 뒤에 타란티노의 영화를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관객으로서 열 번째 작품을 맞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특징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혹은 ‘타란티 노 장르’를 모른다면 정말 생뚱맞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모든 특징들이 마지막 작품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기대할 부분은 ‘마지막인 만큼 어떤 요소가 절정으로 담겨있을 것인 가?’이다. ‘타란티노의 정수’를 보고 싶은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큰 기대감 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타란티노는 기대를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모순적이지만 그 점이 우리가 타란티노를 좋아하는 이유다. 관객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이 우선인 감독이 필요했다. 끝을 모르고 넘쳐가는 돈만을 바라보는 ‘복권 영화’들 틈에서 감독의 색이 짙게 묻어나는 영화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아직까지 극장을 찾게 만든다.
나는 타란티노가 열 번째 작품 이후로 번복을 하여 새로운 작품을 더 만드는 것을 원하 지 않는다. 그의 새로운 작품이 기대가 되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능력이 영화 연출이 아닌 다른 분야로도 뻗어나가는 것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비록 앞으로 시나리오에만 집중 하고 싶다는 타란티노의 말대로라면 직접 하지 않는 연출이 우리의 만족을 채워줄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그여서 쓸 수 있는 시나리오였고 그여서 시도할 수 있으며, 인정받을 수 있었던 연출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타란티노와 결이 맞는, 또 다른 열 편의 끝내주는 영화를 만들어줄 감독이 나타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다.